11장. 서진이의 열

by 이민수

그 전날 밤 지영은 새벽 2시까지 잠들지 못했다. 옆에서 이 대표가 자고 있었고, 지영은 천장을 보고 있었다. 면접 옷을 미리 다림질해 놓았다. 5년 전에 마지막으로 입은 셔츠였다. 어깨선이 좀 안 맞을 것 같았다. 5년 동안 어깨가 좁아진 건지, 셔츠가 늘어진 건지 지영도 몰랐다. 면접 자료도 다 외웠다. 다 외운 자료를 한 번 더 떠올렸다. 떠올리면서 한 번 더 잠 안 오는 자기를 의식했다. 14년 동안 면접에서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던 사람이, 5년 만에 처음 보는 면접을 앞두고 잠 안 오는 새벽을 지나고 있었다.

그 새벽이 끝날 무렵 서진이가 열이 났다.


화요일 새벽 4시 22분에 이 대표는 눈을 떴다. 이번엔 스스로 깬 게 아니었다. 지영이 옆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여보, 자?" 지영의 목소리가 낮았다.

"아니, 깼어."

"서진이가 열이 있는 것 같아."

이 대표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지영이 이미 서진이 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 대표도 따라갔다. 서진이는 이불을 덮지 않고 침대 한가운데 엎드려 있었다. 뺨이 붉었다. 지영이 서진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뜨겁네."

"재볼까?"

"응, 체온계 어디 있어?"

이 대표는 거실 서랍에서 체온계를 꺼내 왔다. 귀에 대고 재는 전자 체온계였다. 38.4도. 이 대표는 숫자를 지영에게 보여줬다. 지영은 잠깐 숫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 먹이자. 해열제 있지?"

"주방 위쪽 선반에."

지영이 해열제를 꺼내러 갔다. 이 대표는 서진이 옆에 앉아서 서진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서진이는 반쯤 감긴 눈으로 이 대표를 봤다.

"아빠, 머리 아파."

"응. 아빠 알아. 엄마가 약 주실 거야."

"엄마 어딨어."

"저쪽에, 약 가지러."

서진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6살이 아플 때 얼굴은 6살답지 않았다. 병원에 있는 어떤 노인의 얼굴 같았다. 작고 힘이 없었다. 이 대표는 서진이 머리카락을 이마 옆으로 넘겨 줬다. 땀이 나 있었다.


지영이 시럽 해열제를 들고 돌아왔다. 약을 먹이면서 지영이 말했다.

"여보."

"응."

"오늘 나 시청 갔다가 바로 면접 있잖아."

이 대표는 잠깐 멈췄다. 면접. 지영의 면접. 이 대표는 한 번 머리를 굴려서 오늘 일정을 떠올렸다.

지영은 지난달부터 다시 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풀타임은 아니고, 주 3일짜리 프리랜서 자리였다. 5년 만에 다시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고, 두 번의 서류 탈락 끝에 오늘 첫 면접이 잡혀 있었다. 지영이 그 면접을 얼마나 준비했는지 이 대표는 알고 있었다. 지난 주말 내내 지영은 거실 식탁에서 노트북을 앞에 두고 뭔가를 썼다. 포트폴리오였다.

"맞네, 오늘이었지."

"서진이 유치원은 못 가겠지?"

"못 가지. 열이 이 정도면."

둘은 잠깐 말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누가 집에 있어야 하는지, 서로 묻지 않고 계산하고 있었다. 지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여보, 나 면접 미룰 수 있나 이따 오전에 물어볼게."

"미룰 수 있어?"

"모르겠어. 물어봐야지."

"오늘 내가 뭐 있더라…"

이 대표는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가방 속 수첩을 꺼내서 오늘 일정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회사 주간 미팅, 오후 2시 신한은행 담당자 미팅(지난주 정 차장 건의 후속), 오후 4시 중부발전 실무진 후속 미팅. 저녁에 투자자 한 명과 저녁 약속. 이 대표는 수첩을 한참 봤다. 면접을 미루는 것과 이 대표가 회사 일정을 옮기는 것 중에 뭐가 더 쉬울까. 회사 일정은 전부 상대방이 있는 자리였다. 특히 중부발전은 한 달 전에 잡힌 자리였고, 이 대표가 나가지 않으면 박 팀장이 혼자 들어가야 했다. 오늘 미팅은 이 대표가 없어도 박 팀장이 잘할 수 있을 거였다. 은행도 일정을 옮기는 것 자체는 가능했다. 그런데 이 대표가 움직인다고 하면, 상대가 '왜'라고 물어볼 거였다. 애 아파서요. 그게 답이었다. 대표가 애가 아파서 미팅을 옮기는 건 괜찮은 일이었다. 괜찮은 일인 줄 머리로는 알았다. 그런데 이 대표는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안 해본 말을 오늘 처음 해야 하는 날이 왔다.


지영이 거실로 나왔다. 서진이는 약을 먹고 다시 잠들었다.

"여보, 내가 오전 미팅 옮길게."

지영은 잠깐 이 대표를 봤다.

"정말 괜찮아?"

"응. 오후에 은행이랑 발전소 미팅 두 개 있는데, 그건 오후라서 서진이 열 좀 내려온 다음에 엄마한테 잠깐 와달라고 부탁하면 될 것 같아."

"어머님이 수원에서 올라오실 수 있을까?"

"오전에 전화드려 볼게. 오늘 아버지가 외출하실 일 없으시면 엄마가 오실 수 있을 거야."

"미안해."

지영이 작게 말했다. 이 대표는 그 말에 잠깐 반응을 못 했다. 지영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다.

"왜 미안해."

"면접이 오늘일 줄 알았으면 다른 날로 잡을 걸 그랬어."

"여보, 그런 건 미리 알 수 없잖아."

"그래도."

이 대표는 지영의 어깨에 손을 잠깐 올렸다. 서진이가 깨지 않도록 거실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그 면접, 가."

"괜찮겠어?"

"괜찮아. 당연히 가야지. 지영이가 준비 많이 한 거잖아."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은 괜찮다고 더 묻지 않았다. 지영은 이 대표가 '괜찮아'라고 말할 때 어느 정도 괜찮은지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늘의 '괜찮아'는 진심 쪽에 가까웠다. 이 대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시계를 봤다. 4시 50분이었다. 서진이의 열이 내려올 때까지, 그리고 아침이 올 때까지, 한 시간 좀 더 남아 있었다.


오전 7시 반, 이 대표는 회사 메신저로 박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박 팀장님, 죄송한데요 오늘 오전 주간미팅 혼자 진행 부탁드립니다. 둘째가 열이 나서 오전엔 집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후엔 출근할게요.


박 팀장은 10분쯤 뒤에 답장했다.

네 대표님, 걱정 마시고 애기 잘 돌봐주세요. 미팅은 제가 진행하고 내용 공유드리겠습니다. 아이 빨리 낫길요.


이 대표는 그 답장을 한참 봤다. '아이 빨리 낫길요.' 박 팀장도 두 아이의 아빠였다. 박 팀장의 아이들은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다. 박 팀장도 애가 열이 나서 회사 미팅을 대신 해달라고 누군가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을까. 있었을 거였다. 박 팀장은 이 대표에게 그 경험을 처음 알려주듯 답장을 써 줬다. '걱정 마시고 애기 잘 돌봐주세요.'

이 대표는 처음으로 '대표가 애 아파서 미팅 못 간다고 하는 게 괜찮은 일'이라는 문장을 실감했다. 괜찮은 일이었다. 괜찮은 일인 줄 머리로 아는 것과, 누군가에게 '걱정 마세요'를 듣는 건 다른 일이었다. 이 대표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은행 담당자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오후 2시 미팅을 오후 4시로 옮길 수 있는지. 은행 담당자는 "네, 가능합니다. 그럼 4시에 뵙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중부발전 담당자에게는 아예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4시로 옮긴 은행과 4시 중부발전이 겹쳤지만, 중부발전이 원래 4시였으니까. 이 대표는 생각을 다시 했다. 은행을 다른 날로 미루는 게 맞았다. 은행 담당자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일정을 잘못 봤습니다. 내일 오전으로 혹시 가능하실까요?


은행 담당자는 곧바로 답했다.

네, 내일 오전 10시로 바꿔드리겠습니다.


이 대표는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일정 하나를 잘못 봐서 두 번 연락했다. 평소 같으면 안 하는 실수였다. 지영의 면접 얘기를 듣자마자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던 모양이었다. 이 대표는 그 사실을 인식했다. 자기가 완벽한 기계가 아니라는 걸 인식하는 날이 요즘 잦아졌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린 건 8시 반이었다.

"엄마, 갑자기 죄송한데요, 오늘 서진이가 열이 좀 나서요."

"어머, 얼마나 되니?"

"38.4도였어요, 새벽에. 지금 약 먹고 자고 있어요."

"병원은?"

"9시 넘으면 데리고 가려고요."

"엄마가 올라갈까? 지영이는 일 있니?"

이 대표는 잠깐 망설였다.

"지영이가 오늘 면접이 있어서요. 제가 오전엔 병원 다녀오고 오후에 회사 가야 하는데, 오후에 엄마가 좀 와주실 수 있을까요."

"응, 엄마 갈게. 지영이 면접 몇 시니?"

"오후 2시라고 하더라고요. 강남 쪽이요."

"그럼 내가 오전에 올라갈게. 아빠한테 점심은 사 드시라고 하고."

"엄마,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네가 건강하게만 있어라. 알았지?"

이 대표는 그 '건강하게만 있어라'를 오래 들었다. 서진이가 아픈 날에 어머니가 이 대표에게 건강하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걱정은 항상 이 대표를 지나 이 대표의 가족으로 가지 않았다. 어머니의 걱정은 언제나 이 대표에서 멈췄다. 이 대표는 그게 어머니의 사랑 방식이라는 걸 마흔이 다 되어 가면서 배웠다.

전화를 끊고 이 대표는 거실 식탁에 앉아서 잠깐 멍했다. 앞에 커피가 있었는데 반쯤 식어 있었다. 이 대표는 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미지근했다. 어제 먹은 피자도 맛이 없었는데 오늘 아침 커피도 맛이 없었다. 맛을 느끼는 감각이 요즘 좀 무뎠다. 의사가 말한 것 중에 이런 것도 있었던가. 이 대표는 기억이 안 났다. 다음 병원 갈 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어볼 것들이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9시 반에 이 대표는 서진이를 데리고 동네 소아과에 갔다. 이 대표가 서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간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은 작년 가을 콧물 감기 때였는데 그때는 지영이 같이 갔었다. 혼자 데리고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서진이는 이 대표의 품에 안겨서 갔다. 서진이가 얼마나 무거워졌는지 이 대표는 걸어가는 동안 느꼈다. 6살의 몸무게는 아빠의 팔이 10분 안에 저려오게 할 정도였다.

대기실에 앉아서 서진이는 이 대표의 어깨에 기댔다. 접수대에 이미 이름을 적어 놓은 뒤였다. 병원은 아침이라 사람이 많았다. 이 대표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아이를 안고 있거나 업고 있거나 옆에 앉혀 놓고 있는 엄마들이었다. 아빠는 이 대표 포함 두 명이었다. 다른 한 명은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아빠였는데, 아이를 안고 핸드폰으로 뭔가를 보고 있었다. 일하는 중인 것 같았다. 이 대표는 그 아빠를 한 번 보고 다시 시선을 거뒀다. 자기도 핸드폰을 꺼낼 뻔했다. 박 팀장의 미팅 결과가 궁금했다. 그런데 꺼내지 않기로 했다. 서진이가 이 대표 어깨에 기대 있었다. 오늘은 이 어깨가 서진이 거였다.

"서진이."

"응."

"아빠가 옛날에 서진이만 할 때는 어떻게 아팠는 줄 알아?"

"어떻게 아팠어?"

"아빠는 편도선이 자주 부었어. 편도선 알아?"

"몰라."

"목 여기쯤에 있는 건데, 부으면 목이 아프고 열이 나."

"아빠 아팠어?"

"많이 아팠지."

"누가 병원 데리고 갔어?"

"할머니가."

서진이는 잠깐 조용했다. 그러다가 말했다.

"아빠, 할머니 너무 늙었어."

이 대표는 웃음이 터졌다. 살짝이었지만 병원 대기실에서 나온 웃음 중에서는 큰 편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해."

"어제 영상통화 했는데 할머니 얼굴이 주름 많았어."

"주름 많은 게 늙은 건 아니야."

"그럼 뭐야."

"주름은 그냥 많이 웃어서 생긴 거야. 할머니가 많이 웃으셨다는 뜻이야."

서진이는 납득했는지 안 했는지 이 대표의 어깨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이 대표는 서진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6살의 등은 따뜻했다. 열이 있으니 더 따뜻했다.


진료는 빨랐다. 감기였다. 의사는 "바이러스성 감기라서 푹 쉬면 2~3일 안에 낫는다"고 했다. 약을 받고 집에 왔을 때가 11시쯤이었다. 어머니가 이미 와 계셨다.

"우리 강아지, 할머니 왔다."

어머니가 서진이를 품에 안았다. 서진이는 할머니 품에서 한참을 안 떨어졌다. 지영은 면접 복장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하얀 셔츠에 검정 바지. 지영이 직장 다닐 때 자주 입던 옷이었다. 이 대표는 오랜만에 지영의 그런 차림을 봤다. 그런 차림의 지영은 5년 전의 지영이었다. 5년 전의 지영과 지금의 지영은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5년 전의 지영은 눈 밑에 피곤이 늘 있었다. 지금의 지영은 피곤 대신 다른 게 있었다.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이 대표는 몰랐다. 지영의 셔츠는 어깨선이 살짝 안 맞아 보였다. 5년 동안 지영의 어깨가 조금 좁아진 건지, 셔츠가 늘어진 건지. 지영은 거울 앞에서 어깨를 한 번 가다듬었다. 가다듬은 채로도 셔츠는 완전히 맞지는 않았다.

"여보, 잘 다녀와."

"응, 고마워. 회사 가실 때 됐어?"

"12시쯤 나가려고. 엄마랑 점심 먹고 나갈게."

"응, 어머님이랑 점심 드시고 가."

지영은 나가기 전에 서진이를 한 번 꽉 안았다.

"서진아, 할머니 말 잘 듣고 있어."

"엄마 어디가."

"엄마 면접 보러 가."

"면접이 뭐야."

"엄마 이제 일 다시 할 건데, 어느 회사에서 일할지 가서 얘기하는 거야."

"엄마 또 일해?"

"응. 주 3일만."

"일 많이 하면 엄마 피곤해."

지영이 잠깐 서진이를 봤다. 6살은 감기에 걸려서도 말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6살이라서 그랬다. 6살은 자기가 보는 대로 말했다.

"엄마 안 피곤하게 할게, 약속."

"응."

지영은 서진이를 한 번 더 안고 현관을 나갔다. 이 대표는 현관 앞까지 배웅을 나갔다. 지영의 신발 뒤쪽이 약간 닳아 있었다. 5년 동안 많이 신지 않은 구두였다. 오늘 신었다. 지영이 신발을 신으면서 한 번 이 대표를 봤다.

"여보, 고마워."

"아니야, 내가 고맙지."

"내가 왜 고마워야 해?"

"오늘 갈 수 있게 해줘서."

지영은 웃었다. 웃으면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지영이 나가고 30분쯤 지영에게서 카톡이 왔다.

지하철이야. 나 잘 할 수 있을까?


이 대표는 답장을 썼다.

당연하지. 원래 잘하는 사람이잖아.


지영이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잠깐 뒤에 한 줄 더 보냈다.

여보, 나 오늘 좀 떨려.


이 대표는 잠깐 화면을 봤다. 5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장이었다. 5년 동안 지영은 이 대표에게 '떨린다'는 말을 안 했다. 5년 동안 지영은 엄마였고 아내였지, 면접자는 아니었다. 면접자의 지영은 떨렸다. 이 대표는 눈 앞에 새로운 지영이 있다는 걸 한 줄의 메시지로 알았다.

5년 만이잖아. 떨려야 정상이야. 그리고 준비 많이 했잖아. 될 일은 될 거야.


잠깐 기다렸다가 한 줄 더 썼다.

나도 오늘 여보 덕분에 많이 배웠어. 고마워.


보내고 나서 이 대표는 자기가 평소 쓰지 않는 말을 썼다는 걸 알았다. '오늘 여보 덕분에 많이 배웠어'는 이 대표가 지영에게 한 번도 안 써본 문장이었다. 이 대표는 지영에게 늘 받기만 했고, 받은 걸 인정한 적이 거의 없었다. 오늘은 서진이가 아팠고, 이 대표는 미팅을 옮겼고, 그 과정에서 이 대표가 혼자 해낸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박 팀장이 있었고, 어머니가 있었고, 무엇보다 지영이 미안해할 필요 없는 일에 미안해한 지영이 있었다. 이 대표가 5년 동안 받기만 한 것들이 이제 보였다.

지영이 답장했다.

여보 오늘 뭐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 면접 끝나고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가.


이 대표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서진이는 할머니 옆에서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서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셨다. 이 대표가 어릴 때 어머니가 읽어 주시던 그 억양이었다. 아이가 어른을 따라 하는 거라고 이 대표는 생각했었는데, 어른도 자기가 어릴 때 배운 억양을 평생 가지고 가는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억양은 어머니의 어머니에게서 왔을 거였다.

이 대표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그 광경을 잠깐 봤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책을 읽어 주는 모습. 이 대표는 이 장면을 오늘 처음 봤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어머니는 73살이었고, 서진이는 6살이었다. 어머니가 서진이에게 책을 읽어 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이 대표는 그 계산을 하다가 그만뒀다. 계산하면 더 슬퍼지는 계산들이 있었다. 오늘의 장면을 그냥 오늘의 장면으로 두는 게 나았다.


12시 반, 이 대표는 어머니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회사에 나왔다. 점심은 어머니가 냉장고에서 꺼내서 차려주신 밥과 반찬이었다. 지영이 지난주에 해놓은 반찬들이었다. 어머니는 며느리 반찬을 맛있게 드시면서 한 마디 하셨다.

"지영아, 너도 좀 쉬어. 너 얼굴이 더 안 좋아."

지영은 면접 가기 직전이라 부엌에서 셔츠 매무새를 살피고 있었다.

"괜찮아요, 어머님."

"너 14년 회사 다닐 때도 아빠한테 그랬다며. 괜찮아요라고만 했다며."

지영은 잠깐 멈췄다. 시어머니가 14년이라는 숫자를 알고 계셨다. 며느리의 직장 햇수를 정확히 외우고 계신 시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 지영에게 잠깐 무언가를 줬다.

"어머님이 그건 어떻게 아세요."

"엄마들은 그런 거 다 알아."

지영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부엌의 거울에 잠깐 머물렀다. 이 대표는 그 광경을 거실에서 봤다.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쉬어라"라고 하는 그 한 마디가, 지영의 14년을 인정한 어머니의 방식이라는 걸 이 대표는 알았다. 아무도 인정해 준 적 없는 14년이 있었고, 그걸 시어머니가 처음 인정했다. 이 대표가 인정해 줬어야 하는 일이었는데, 시어머니가 먼저였다. 이 대표는 부엌의 두 사람을 보면서 그 사실을 인식했다. 인식하고 인식한 자리가 잠깐 묵직해졌다.

회사에 도착한 건 오후 1시 반이었다. 박 팀장은 자기 자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가 이 대표를 보고 일어났다.

"대표님, 오후에 출근하셨네요. 애기는 좀 어때요?"

"네, 약 먹고 자요. 박 팀장님 덕분에 오전 잘 넘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런 거 당연히 제가 하죠."

'그런 거 당연히 제가 하죠'라는 말이 이 대표에게 오래 남았다. 박 팀장이 오전 미팅을 대신 진행한 게 '당연한 일'이라고 박 팀장이 먼저 말해줬다. 이 대표에게는 그게 당연한 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대표가 지금까지 회사에서 만든 문화가, '대표 없이도 돌아가는 회사'가 아니라 '대표가 모든 걸 해야 하는 회사'였다는 걸 이 대표는 박 팀장의 그 한 마디로 다시 생각했다.

4시 중부발전 미팅까지 두 시간 반이 비어 있었다. 이 대표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아침에 못 한 메일들을 처리했다. 지영은 오후 3시쯤 면접이 끝났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결과는 1주일 안에 알려준대.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어." 이 대표는 답장을 썼다. "수고했어, 여보. 일찍 집에 들어가서 쉬어. 내가 저녁에 서진이 볼게."

저녁에 이 대표는 7시쯤 회사를 나왔다. 저녁 투자자 약속은 미루지 않고 그대로 갔다. 한 시간짜리 저녁이었고, 가볍게 맥주 한 잔씩 마셨다. 투자자는 "아까 매출 얘기 잘 들었습니다" 같은 말을 했고, 이 대표는 "네, 감사합니다" 같은 말을 했다. 구체적인 투자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이런 저녁이 요즘 이 대표의 저녁의 상당 부분이었다. 결과가 분명하지 않은 자리들. 다녀도 안 다녀도 비슷한 자리들. 이 대표는 그런 자리도 가야 했다. 한 번 빠지면 다시는 부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집에 돌아온 건 9시 반이었다. 서진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지영은 거실에서 노트북을 앞에 두고 뭔가를 보고 있었다. 이 대표가 들어오자 노트북을 덮었다.

"여보, 수고했어."

"응, 서진이는?"

"열은 37.1도 정도로 내려왔어. 약 한 번 더 먹고 잤어."

"다행이네."

이 대표는 소파에 앉았다. 지영이 맞은편에 앉았다. 둘 다 잠깐 아무 말을 안 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조용함이 있었다. 오늘은 그런 조용함이었다.

"여보."

"응."

"오늘 하루 어땠어?"

지영이 먼저 물었다. 이 대표는 그 질문에 답할 말을 찾고 있었다. 오늘 하루 어땠냐. 서진이가 열이 났고, 박 팀장이 '걱정 마시라'고 해줬고, 어머니가 수원에서 올라오셨고, 서진이와 단둘이 병원에 다녀왔고, 지영은 5년 만에 면접을 갔고, 투자자와 형식적인 저녁을 먹었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한 단어로 말할 수 있을까.

"하루가 길었어."

이 대표는 그렇게 말했다.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여보, 고마워."

"뭐가."

"몰라. 그냥 다."

지영은 웃었다.

"그 '그냥 다'는 나도 여보한테 해야 해."

"그래?"

"응."

둘은 서로 웃었다. 크게 웃지는 않았다. 오늘 같은 날 크게 웃는 건 어색했다. 작게 웃는 게 맞았다. 작게 웃어도 웃는 건 웃는 거였다.

이 대표는 지영 옆 쿠션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봤다. 거실 천장의 등이 조금 흐렸다. 전구를 갈 때가 됐다. 이 대표는 이번 주말에 갈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또 잊어버릴까 봐 핸드폰 메모에 적었다. '거실 전구 교체.' 메모에는 할 일이 이미 스물몇 개쯤 적혀 있었다. 하나가 더 추가됐다. 추가된 일이 조금 반가웠다. 오늘은 추가된 일이 무겁지 않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서진이가 잠든 방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지영의 숨소리와 서진이의 숨소리와 이 대표의 숨소리가 거실에서 겹치고 있었다. 세 사람의 숨이 한 공간에 있었다. 오늘 하루의 가장 좋은 장면이 지금이라는 걸, 이 대표는 소파에 기댄 채로 알았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0화10장. 친구 A의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