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오후 4시 20분, 이 대표는 양재역에서 신분당선을 탔다. 강남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 길이었다. 양재 쪽에 사무실이 있는 거래처를 방문하고 회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미팅 일정을 이 대표는 작년까지 되도록 피했다. 택시를 탔다. 그런데 올해부터 택시비가 부담스러워서 가까운 거리는 다시 지하철을 탔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양재역에서 강남역까지는 한 정거장. 4분이면 갔다. 열차 안은 러시아워 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월요일 오후의 신분당선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것 같았다. 이 대표는 문 옆에 섰다. 앉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서서 가는 편이 내리기 편했고, 서 있으면 가방을 뒤로 돌려 메고 있을 수 있었다. 가방의 안쪽 주머니에 약이 있었다. 약이 가까이 있다는 감각이 이 대표에게 익숙한 안정감이 됐다.
열차가 양재역을 떠났다. 사람이 좀 더 탔다. 열차 안의 공기가 조금 더 무거워졌다. 이 대표는 문 유리를 통해 창밖의 지하 터널을 봤다. 다음이 강남역이었다. 그게 오늘의 코스였다.
강남역이 가까워질 때쯤이었다. 문 유리에 비친 자기 얼굴을 이 대표는 봤다. 얼굴이 조금 창백해 보였다. 평소보다 눈 밑이 어두웠다. 이 대표는 자기 얼굴을 보려고 본 게 아니라, 창밖을 보려다가 유리에 비친 게 저절로 들어온 거였다. 그런데 그 순간 이 대표는 다른 것을 느꼈다.
숨이 얕아지고 있었다.
이 대표는 그 감각을 알았다. 이름 있는 감각이었다. 한 번 겪어보고 배워둔 감각이었다. 이 대표는 속으로 자기에게 말했다. 괜찮아. 약 있어. 넷까지 들이마시고 여섯까지 내쉬어. 이 대표는 들이마시는 걸 시도했다. 넷까지 세려 했는데 셋에서 걸렸다. 공기가 안 들어왔다. 목 어디쯤에서 공기가 막히는 느낌이었다. 다시 들이마셨다. 여전히 막혀 있었다.
강남역이 다음 정거장이었다. 안내 방송이 나왔다. 강남역, 강남역입니다. 2호선으로 갈아타시는 분은 이번 역에서 내리시기 바랍니다.
이 대표는 갈아타야 했다. 2호선으로. 강남역에서 갈아타는 통로. 작년 가을 처음 그 일이 일어난 바로 그 통로였다. 이 대표는 그 통로를 그 뒤로 여러 번 지났다. 지날 때마다 약간의 긴장감이 있었지만, 지난 몇 달은 비교적 괜찮았다.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차 안에서 이미 시작됐다. 갈아타는 통로에 들어가기도 전이었다.
열차가 강남역에 섰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문 옆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내려야 한다는 생각과 못 내리겠다는 감각이 동시에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죄송합니다"라고 하면서 이 대표를 스쳐 지나갔다. 이 대표는 옆으로 몸을 조금 비켜 줬다. 사람들이 다 내리고 문이 닫히려는 찰나에 이 대표도 내렸다. 문이 이 대표 뒤에서 닫혔다. 내리기 직전의 찰나였다.
플랫폼에 내려서 이 대표는 벽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빠르지 않았다. 느리지도 않았다. 자기 다리가 자기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그랬다. 벽 앞에 섰다. 광고판 앞이었다. 아파트 분양 광고였다. 한강뷰 최고의 단지, 라는 문구가 크게 쓰여 있었다. 이 대표는 그 광고판을 보지 않고 그 옆의 회색 벽에 어깨를 기댔다.
들이마시고 내쉬기. 넷. 여섯. 속으로 세었다. 들이마시는 게 여전히 넷까지 안 됐다. 셋에서 계속 걸렸다. 내쉬는 건 여섯까지 가능했다. 들이마시는 것만 막혔다. 이 대표는 입을 좀 벌리고 깊게 들이마셔 봤다. 공기가 들어오긴 들어왔다. 그런데 가슴까지 내려가지 않았다. 목 어디쯤에서 멈추는 느낌이었다. 이 대표는 가방을 앞으로 돌려서 지퍼를 열었다. 안쪽 주머니의 약 봉지를 꺼냈다. 봉지에서 알약을 한 알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잠깐 봤다. 하얀색 작은 알. 5밀리미터쯤. 이 대표는 그 알약을 입에 넣었다. 침이 없어서 삼키기가 어려웠다. 이 대표는 가방 옆구리에서 생수병을 꺼내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약은 넘어갔다.
약을 먹었다고 곧바로 효과가 오는 건 아니었다. 의사가 말했다. 20분쯤 걸립니다. 그동안은 그냥 숨을 쉬시면 돼요. 이 대표는 의사의 목소리를 머릿속에 다시 불러왔다. 그동안은 그냥 숨을 쉬시면 돼요. 그동안은 그냥.
이 대표는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플랫폼의 소음이 들렸다. 다음 열차 안내 방송, 사람들 발소리, 누군가의 웃음소리, 휴대폰 벨소리. 소음이 많았다. 많은 소음 속에서 이 대표는 자기 숨소리만 들으려 했다. 잘 안 됐다. 자기 숨소리가 다른 소음 사이로 숨었다. 숨는 숨소리를 찾는 게 이 대표가 지금 하는 일이었다.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세요?"
이 대표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이 대표를 보고 있었다.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이 대표는 그 여자의 얼굴이 낯설었는데, 낯선 사람이 자기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이 순간 멍했다.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얼굴이 너무 하얘서요. 도움 필요하면 역무실 가실래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여자는 잠깐 이 대표를 더 봤다. 그러다가 "네, 몸 조심히 하세요" 하고 지나갔다. 쇼핑백을 들고 2호선 쪽으로 걸어갔다. 이 대표는 그 여자의 등을 잠깐 보다가 다시 벽에 기댔다. 이상한 감정이 훅 왔다. 눈이 더워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나지 않았다. 이 대표는 공황 중에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방금 처음으로 울 뻔했다. 낯선 사람이 괜찮냐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그 한 마디에 이 대표의 무언가가 꿀렁했다.
이 대표는 그 감정을 삼켰다. 목이 움직였다. 약보다 그 감정 삼키기가 더 어려웠다.
20분쯤 지났을까, 이 대표는 약이 듣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들이마실 때 셋에서 걸리던 게 넷까지 갔다. 다섯까지 갔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시작된 파도가 꺾이고 있었다. 이 대표는 벽에서 몸을 천천히 뗐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렸다. 잠깐 서 있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2호선 플랫폼으로. 갈아타기 위해. 가는 길에 아까 말을 걸어준 50대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대표는 그 여자를 멀리서 한 번 보고, 눈인사라도 할까 하다가 안 했다. 여자도 이 대표를 본 것 같았지만 이 대표처럼 인사를 안 했다. 둘 다 모른 척하는 게 편한 순간이 있었다. 오늘이 그런 순간이었다.
2호선 열차를 탔다. 이 대표는 빈 자리에 앉았다. 앉는 걸 오늘 처음 했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앞자리에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뭔가 얘기를 하면서 웃고 있었다. 이 대표는 그 웃음을 한참 봤다. 어떤 날에 웃음은 부럽지 않은 것인데, 어떤 날에는 웃음이 이상하게 멀어 보였다. 오늘은 후자였다. 고등학생의 웃음이 이 대표에게 먼 나라의 일처럼 보였다. 이 대표도 저런 웃음을 웃은 적이 있었을 거였다.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났다.
이 대표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지영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 잠깐 머물렀다. 뭐라고 쓸지 고민하다가, 이 대표는 메시지를 쓰지 않고 핸드폰을 다시 넣었다.
지영에게는 지난주에 말했다. 약을 먹고 있다고. 공황장애라고. 다음 병원에 같이 가기로 했다. 지영은 그 뒤로 이 대표에게 조심스럽게 몇 가지를 물었다. "오늘 괜찮았어?" "많이 힘들진 않았어?" 이 대표는 대답했다. "괜찮았어." "별로." 그 대답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이 대표도 모르겠었다. 그날마다 달랐다. 어떤 날은 진짜 괜찮았고, 어떤 날은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했다. 지영은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지영은 이 대표가 말하는 만큼만 듣는 사람이었다. 지영이 그 선을 지켜주는 게 이 대표에게는 다행이면서도 어려웠다. 선이 있는 관계는 편한 동시에 슬펐다.
오늘 지하철에서 겪은 일을 이 대표는 지영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은. 이 대표는 지난주에 약을 지영이 알게 된 것이 그 주에 먹은 약보다 이 대표에게 더 많은 약이었다. 그 효과는 아직 이 대표 몸에 남아 있었다. 오늘의 일을 또 지영에게 가져가면, 이 대표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영에게 가져가면 지영이 같이 무거워졌다. 지영이 같이 무거워지면 이 대표가 더 무거워졌다. 무거움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면서 커졌다. 오늘은 그걸 안 하기로 했다. 혼자 감당할 수 있는 하루였다.
선릉역 근처 회사 사무실에 도착한 건 오후 5시 반이었다. 거래처 미팅에서 돌아오는 길이 평소보다 30분 더 걸렸다. 박 팀장은 이 대표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
"대표님, 미팅 어떠셨어요?"
"잘 됐어요. 다음 주 월요일에 후속 미팅 잡혀 있어요."
"좋네요."
박 팀장은 이 대표의 얼굴을 한 번 더 봤다. 박 팀장의 시선이 이 대표의 얼굴에 잠깐 머물렀다. 박 팀장은 입을 살짝 열었다가 닫았다. 물어보려다 안 물어본 것이었다. 이 대표는 박 팀장이 뭘 물어보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같은 말이었을 거였다. 박 팀장은 그걸 묻지 않았다. 이 대표는 고마웠다. 오늘은 묻지 않는 것이 감사한 날이었다.
"박 팀장님, 저 잠깐 회의실에서 정리 좀 하고 올게요."
"네."
이 대표는 회의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앉아서 눈을 감았다. 5분만. 5분만 눈을 감고 있으려 했다. 5분이 10분이 됐다. 이 대표는 눈을 떴다. 창밖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회의실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에는 박 팀장이 아침에 그린 다이어그램이 남아 있었다. 분기 목표를 각 팀별로 분해한 그림이었다. 이 대표는 그걸 읽었다. 읽었지만 머릿속에 잘 안 들어왔다. 지금 들어가야 하는 정보가 아니었다.
이 대표는 회의실에서 나왔다. 자기 자리로 가서 노트북을 켰다. 저녁 7시쯤 퇴근했다. 퇴근할 때 박 팀장이 한 번 더 이 대표를 봤다.
"대표님, 조심히 가세요."
"네, 박 팀장님도요."
이 대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조심히'라는 말이 오늘만 몇 번 들린 건지. 지영이 보낸 메시지에서, 아까 낯선 여자가 해준 말에서, 박 팀장에게서. 세 번. 하루에 세 번 '조심히'를 듣는 건 많은 걸까, 적은 걸까. 이 대표는 그 단위를 모르겠어서 세는 걸 그만뒀다.
집에 도착한 건 8시 20분이었다. 거실에 들어선 이 대표는 잠깐 멈췄다. 부엌은 비어 있었다. 지영이 부엌에 없었다. 거실 소파에 지영이 누워 있었다. 식탁에 서준이가 혼자 앉아 밥을 먹고 있었고, 서진이는 옆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엄마 누워 있어." 서준이가 이 대표를 보고 말했다.
"엄마 어디 아파?"
"응. 머리 아프대."
이 대표는 가방을 내려놓고 거실로 갔다. 지영은 눈을 감고 있었다. 깊이 자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누워 있는 거였다.
"여보, 괜찮아?"
지영이 눈을 떴다.
"…편두통 좀 와서. 약 먹었어."
"많이 안 좋아?"
"이제 좀 가라앉고 있어. 한 시간 전에는 더 심했어."
"애들 밥 내가 챙길게. 좀 더 누워 있어."
"…응. 미안."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지영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이 대표는 거실 소파 옆에 잠깐 앉았다. 지영의 이마에 손을 한 번 댔다. 미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 대표는 손을 떼고 부엌으로 갔다. 서준이의 밥그릇에 반찬을 더 놓아 줬다. 서진이에게 물 한 컵을 따라 줬다. 서진이는 그림에 집중하느라 이 대표가 옆에 와도 잠깐 봤다가 다시 그림을 봤다.
이 대표는 자기 밥을 따로 챙기지 않았다. 식욕이 없었다. 식탁에 앉아서 서준이 옆에서 같이 있어 줬다. 서준이는 평소보다 조용히 밥을 먹었다. 엄마가 누워 있는 날의 서준이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8살이 그걸 알아채고 있었다. 8살이 자기 엄마를 살피는 일이 어쩌다 평일 일상이 됐는지, 이 대표는 잠깐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생각해 봐야 답이 없는 문제였다.
밤 9시 반쯤 지영이 일어났다. 좀 가라앉은 것 같았다. 약이 들어서 인지, 그냥 시간이 지나서 인지. 지영은 거실 식탁에 와 앉았다. 이 대표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아이들은 둘 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 있었다.
"여보, 좀 괜찮아?"
"응. 이젠 괜찮아."
"자주 와?"
"한 달에 서너 번?"
"…한 달에 서너 번이면 자주야."
"응. 자주야."
지영은 그렇게 말하고 작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입꼬리가 잠깐 올라간 거였다.
"여보, 오늘 일은 어땠어?"
"…괜찮았어."
이 대표는 그렇게 말했다.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괜찮았어'가 어느 정도의 괜찮음인지, 지영은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게 오늘 지영의 선이었다. 지영이 오늘 그 선을 지키는 걸 이 대표는 고마워했다.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지영이 묻지 않는 건, 지영이 알아서 물러나 줬기 때문이었다. 이 대표가 그 선을 만들어 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지영이 혼자 만들었다.
"여보." 이 대표가 말했다.
"응."
"지난주에, 병원 같이 가자고 해준 거. 고마워."
지영은 잠깐 이 대표를 봤다. 지영은 그 말을 오늘 처음 듣는 건 아니었다. 지난주 식탁에서도 들었다. 이 대표는 지난주에 고맙다고 했다. 오늘 다시 고맙다고 했다. 이 대표가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지영은 이 대표가 왜 같은 말을 다시 했는지 짐작이 됐다. 오늘 뭔가 있었던 거였다. 지영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았지만, 이 대표의 그 '고마워'가 오늘 있었던 무언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이해했다.
"여보, 나한테 고마워할 거 많이 쌓아두지 마."
"응?"
"한 번씩 말해. 쌓아두면 빚이 돼."
이 대표는 잠깐 말이 없었다. 소파 쿠션에 몸을 기댔다. 지영을 봤다. 지영은 웃고 있지 않았다. 웃고 있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어느 때인가부터 지영은 이런 얼굴을 자주 지었다. 말 없이 말하는 얼굴. 이 대표는 그 얼굴을 읽을 줄 알았다.
"…알았어."
"응."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대표는 TV를 켜지 않았다. 지영도 핸드폰을 꺼내지 않았다. 조용한 거실이 두 사람 주위에 있었다. 이 대표는 그 조용함이 오늘 가장 반가웠다. 오늘 이 대표가 하루 동안 지나온 소음이 많았다. 지하철의 소음, 회의의 소음, 자기 머릿속의 소음. 그 소음들이 지금 이 거실 조용함 안에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 대표는 가방을 열어서 약 봉지를 다시 확인했다. 안쪽 주머니. 봉지는 아까보다 한 알 줄어 있었다. 월요일 오후 4시 반쯤에 한 알을 먹은 걸 이 대표는 기억했다. 봉지에 남은 약은 세 알이었다. 2주 전에 받은 처방이었는데 벌써 7알을 먹었다. 빠른 속도였다. 다음 병원은 화요일, 즉 내일이었다. 지영이 같이 가기로 했다. 이 대표는 내일 병원 가서 이 속도에 대해 의사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영 앞에서 그 얘기를 하게 될 거였다. 지영 앞에서 의사에게 자기 증상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이 대표가 상상해본 가장 무서운 일 중 하나였다. 무서웠지만 내일 해야 했다.
이 대표는 약 봉지를 가방 안쪽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지퍼를 잠갔다. 옆에서 지영이 침대에 누웠다.
"여보, 불 꺼도 돼?" 지영이 물었다.
"응, 꺼도 돼."
지영이 스탠드를 껐다. 방이 어두워졌다. 이 대표는 천장을 봤다. 천장은 익숙한 어둠이었다. 이 대표의 오른손이 천천히 지영의 손을 찾았다. 어둠 속에서 손끝이 지영의 팔에 닿았다. 지영은 가만히 있었다. 이 대표는 손을 지영의 손 위에 올렸다. 포개는 게 아니라 살짝 올리기만 했다. 지영의 손이 이 대표의 손을 받아 줬다. 그게 오늘 이 대표가 지영에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지영은 그 전부를 받았다. 이 대표의 숨이 조금씩 깊어졌다. 넷까지 들이마시고 여섯까지 내쉬었다. 이번에는 넷까지 다 찼다. 숨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가 드디어 끝나가고 있었다. 끝나가는 하루 옆에 지영의 손이 있었다. 그게 전부였고, 그게 전부로 충분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