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소설 『농담』을 읽고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밀란 쿤데라, 『농담』, 방미경 옮김, 민음사, 2017, 59쪽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 나오는 핵심 문장입니다. 주인공 루드비크가 여자친구 마르케타에게 보낸 엽서 내용입니다. 루드비크의 표현대로 ‘아무 의미 없는 말일뿐이었고, 그저 당시 기분에 따라 던진’ 농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앞길 창창하던 대학생 루드비크는 이 농담 한 마디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공산당에서 축출당해 수용소 생활을 합니다. 탄광에 끌려가서 일을 합니다. 농담 한 마디로 그의 인생은 비참하게 전락한 것이지요.
루드비크가 마르케타에게 왜 그런 바보 같은 농담을 했는지 잠깐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루드비크는 마르케타를 만나면서부터 그녀를 생각하면 중학생처럼 설레었습니다. 자주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곧 맞이하는 방학 2주 동안 마르케타와 단 둘이서 관계를 좀 더 진전시켜 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르케타는 혁명 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익히는 연수를 가게 되어 신난다면서 떠나고 맙니다.
루드비크는 그때 질투심이 나서 죽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루드비크의 그런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연수를 간 마르케타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녀 자신이 체험하는, 아침 체조에서부터 보고, 토론회, 노래 등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그녀를 황홀하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건전한 정신’이 그곳을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루드비크는 그녀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에는 다 동의하면서도 그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데, 그녀는 만족스럽고 행복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불만을 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충격을 주고, 혼란에 빠지게 하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래서 서두에서 인용한 문구를 써서 엽서를 보낸 것입니다.
루드비크가 애인에게 써 보냈던 이 문구 때문에 그의 삶은 송두리째 파탄 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루드비크의 농담, 과연 그 속에는 어떤 '진담'이 숨어 있었으며, 우리는 왜 그 농담의 비극성에 주목해야 할까요?
루드비크가 한 농담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 별다른 의미를 담지 않고 보낸 말이었을 따름입니다. ‘나에게 소홀히 해도 우리 연애가 잘 될 거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과 은밀하고 즐겁게 보낼 줄 모르면 건전한 정신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라는 뜻이었지요.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애인에 대한 일종의 투정이라고나 할까요.
1948년 2월, 당시 체코 사회에는 공산 혁명의 분위기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습니다. 루드비크는 공산주의 학생 연맹에 속해 있으면서도, 잘 웃고 농담을 즐기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경멸어인 ‘지식인’ 냄새를 풍긴다고 동료들에게 견제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공산혁명을 위한 계급의 낙관주의에 따른 금욕적이고 장엄한 기쁨’만 기쁨이었고, 해학이나 아이러니는 용인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니 루드비크가 엽서에 쓴 내용이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질 리 없던 것입니다.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리기에 딱 좋은 말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농담 때문에 공산당 학생위원회 위원들에게 조사받을 때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류의 아편이라 했는데, 네 눈에는 아편이 바로 우리의 낙관주의란 말이지!”라든가 “트로츠키주의자에게는 건설적 낙관주의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아편에 불과할 뿐일 테지.” 하고 공격을 받은 것도 다 그런데 연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루드비크의 농담이 담긴 엽서를 받은 마르케타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루드비크는 평소 가벼운 농담을 즐기는 편인데, 마르케타는 무엇이라도 잘 믿고 매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루드비크의 엽서를 받은 마르케타가 어떻게 했으리라는 것은 여기서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시대정신이 가진 경직성과 위험성을 외면한 채, 여자친구의 성격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중심으로 던진 ‘신중치 못한 농담’ 한마디 때문에 루드비크의 인생은 몰락하게 됩니다.
‘농담’이란 말은 ‘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 또는 ‘남을 놀리거나 웃기기 위해 실없이 하는 장난말이나 우스갯소리를 이르는 말’입니다. 농담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해서 사람들을 생기 있게 하거나 재미를 선사해 줍니다. 하지만, 모래알이 입안에 씹히는 것처럼 인간관계를 서걱거리게 하거나 썰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재미있게 말을 잘한다는 사람은 유머와 농담을 적절히 활용합니다. 일상의 대화나 연설, 강의, 강연에서 유머와 농담을 적절히 섞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농담 한 마디 때문에 분위기기가 경직되는 경우도 흔하고, 뒷수습이 불가능한 문제로 비화되는 걸 왕왕 봅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나 유명 연예인 들 가운데서 한마디 말실수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지요.
"친한 친구 사이라도 함부로 농담을 주고받지 말라" (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 2007. 5. 10. 고전연구회 사암, 한정주, 엄윤숙(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시대 학자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 '수신(修身)'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연히 친구를 만나 농담을 한두 번 건넸는데도 반응이 없으면, 다시는 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다가 만약 서로 말다툼이라도 하게 되면 반드시 마음속에 맺혀서 원한을 품게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농담은 신중히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루드비크는 매사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성격을 가진 여자친구의 성격을 가볍게 여긴 셈입니다. 신중하지 못한 농담이 빚은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마르케타와 어긋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엽서 내용이 제삼자에게 전달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던 것이지요.
정치인들의 막말과 공인의 실언이 잦아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사회적인 낭비도 심합니다. 막말하면서 제 딴에는 유머를 한 것이라거나, 논란이 되면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다, 가볍게 농담한 건데 와전되었다며 우깁니다. 어떤 정치인은 이른바 ‘아재 개그’를 자신의 장기처럼 내세웁니다. 정치인이나 공인이 ‘별생각 없이’ ‘함부로’ 던진 한마디가 괜한 오해와 불신을 낳고, 사회적 낭비를 조장합니다.
이제는 ‘농담 인지 가능성’을 따져봐야 하는 건 아닐까요? 물론 이 말이 학문적으로 성립하는가, 그 여부는 별개입니다. 마치 성차별 요소를 감지하는 ‘성 인지 감수성’이 있듯, 농담을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농담을 하는 사람의 의도와 받아들이는 사람의 민감성을 고려하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 여부가 어떠냐에 따라서 간극을 좁히기 어려운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겁니다. 때와 장소, 무엇보다 그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을 잘 가려서 하는 풍토를 조성해야 하겠습니다.
농담! 좋지요. 그러나 내가 하려는 한 마디가 윤활유가 될 것인가, 모래를 뿌리는 건 아닐까 한 번 더 진중하게 생각하는, 일종의 자기 입에 파수꾼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긴요한 게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