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의 수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읽고
꼭 사흘 동안이라도 볼 수 있다면 무엇이 제일 보고 싶은 지 생각해 봅니다. 첫날은 친절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 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남이 읽어 주는 것을 듣기만 했던, 내게 삶의 가장 깊숙한 수로를 전해준 책들을 보고 싶습니다. 오후에는 오랫동안 숲 속을 거닐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보겠습니다. 찬란한 노을을 볼 수 있다면, 그날 밤 아마 나는 잠을 자지 못할 겁니다.
(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샘터, 2008, 151~153쪽.)
헬렌 켈러의 수필 <사흘만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의 한 구절입니다. 생후 9개월경에 열병으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된 뒤부터 평생을 시청각장애인으로 살아내야 했던 헬렌 켈러의 절절한 마음이 엿보이는 글입니다.
그녀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보고 싶은 걸 꼽았습니다. 첫째 날에 자신의 삶을 열어준 설리번 선생님과 사랑하는 친구들, 애견들과 자연들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둘째 날에는 빛이 어둠을 밀어내는 풍경과 박물관, 미술관 등을 돌아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도시 한복판을 거닐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꼭대기로 올라가 도시의 풍경을 보고 나서 뉴욕의 5번가를 거닐고, 공장지대나 슬럼가, 공원 등을 둘러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앞을 못 보는 그녀에게는 너무나 절실히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것들입니다. 우리들이 늘 보고 만지고 누리는 아주 평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 다시 암흑세계에 갇히더라도 미처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 것이라 했습니다. 사흘 동안 본 기억들이 손끝으로 만지는 사물마다 묻어날 것이니 말입니다.
이 글이 발표된 1930년대, 미국은 ‘세계 대공황’의 가운데 헤매고 있었습니다. 경제 혼란에 허덕이는 서민들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글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선정한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헬렌 켈러의 위대한 삶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그녀가 지니고 있던 '삶의 욕망'에 주목하려 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목마름에 물을 마시고 배고픔에 밥을 먹는 기본적인 '욕구'를 넘어설 때, 인간은 비로소 주체로서의 '욕망'을 발현합니다. (헤겔은 '욕구 Bedürfnis'를 주체 내 결핍 상태 자체로, '욕망 Begierde'은 그 결핍을 채우려는 주체의 의식적 지향으로 구분한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욕구·욕망' - 헤겔사전, 2009) 이는 단순한 결핍 해소를 넘어 자아를 증명하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정받으며,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려는 의식적인 지향에 가깝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서도 이러한 인간 본연의 욕망만 있다면, 희망도 보이고 살아갈 힘도 생기지 않을까요?
헬렌 켈러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간절한 삶의 욕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의 절절한 바람은 당시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안겨줍니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이러한 인간 본연의 욕망은 비록 희망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살아갈 힘을 부여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됩니다.
어떤 일을 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역시 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옵니다. 욕망 없이 해낼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일까요?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욕망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학생들이 학업 성취를 꿈꾸고, 청년들이 원하는 직장을 구하는 강렬한 의지는 물론, 나이 들어서도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고, 또는 여행을 떠나는 모든 행위가 바로 이러한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이 욕망이야말로 우리의 꿈을 성취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는 원동력입니다.
이처럼 단순한 생존의 욕구를 넘어, 자아를 형성하고 스스로를 확장시키려는 인간 본연의 욕망은 우리의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이 절실한 욕망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하며, 우리 역량을 극대화합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하고 싶음')이 곧 욕망이라면,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할 수 있음')이 바로 역량입니다. 우리는 이 욕망을 품고 역량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강력한 삶의 원동력이자 우리의 역량을 꽃피우게 하는 욕망도, 현명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되새겨야 할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욕망의 실현은 절제가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제는 욕망을 실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욕망은 때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기차가 궤도를 이탈하는 것은 예정에 있거나 사전에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 듯이, 일탈은 대부분 아차 하는 순간에 벌어집니다. 우리 또한 정상적인 궤도에서 일탈하면 사고를 당하거나 죽음의 길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자제하는 지혜, 절제하는 힘은 평소의 삶의 태도에서 나옵니다.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다른 소소한 마음의 끌림 들을 참아낼 줄 알아야 합니다. 작은 욕망에 매달릴수록 큰 욕망의 실현은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반사회적, 비윤리적, 비도덕적 욕망들은 배설물로 여기고 단호히 외면해야 합니다. 자제력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하는 필수적인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제력을 지나치게 요구하면 의욕도 떨어지고 기쁨과 즐거움을 잃기 쉽습니다. 스트레스가 되지 않도록 적절하게 조절하는 지혜도 발휘해야 합니다. 욕망이 지나치면 욕심으로 변질되어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이는 고위 공직 후보자 국회청문회에서도 실증적으로 확인됩니다. 업무 능력과 더불어 도덕성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세금 탈루, 병역 면탈, 부동산 투기 등 사적 이득을 위한 비도덕적 행위가 드러나 지탄받는 후보자들이 많습니다. 이는 대부분 욕심이 지나쳐 자제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마음 비우기’와 ‘내려놓기’, ‘더 내려놓기’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참 좋은 일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런데 신이 아닌 우리 인간이, 더욱이 종교인도 아닌 평범한 사회인인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강한 욕구를 내려놓거나 포기하기는 너무도 힘든 문제입니다.
저는 그런 것들을 더 좋은 것으로 채우기 위한 내면 청소와 정리 정돈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정리 정돈의 핵심은 간추려 버리기, 쓸데없는 것, 잘 쓰지 않는 것 등 골라내 과감히 버림으로써 더 좋은 것들을 받아들일 여유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우리가 매일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컴퓨터도 주기적으로 저장 용량을 감안해 잘 쓰지 않는 앱이나 자료들을 휴지통에 버렸다가 비우기를 해야 하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인해 좌절하고 고통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나의 뜻대로 통제하려는 집착과, 다른 이의 시선에 반응하는 수동적 욕망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상황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여유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내려놓음은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고요함, 즉 진정한 평온 속에서 스스로의 욕망을 성찰하고, 그 고삐를 쥐는 힘을 기르게 합니다.
내려놓음은 또한 삶의 에너지를 불필요한 곳에 낭비하지 않고,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됩니다. 복잡하고 지엽적인 욕망들을 비워낼 때, 우리는 더욱 선명한 시야로 삶의 본질을 관통하는 본연의 욕망을 바라보고,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우리 안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내려놓음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됩니다. 과거의 아쉬움이나 스스로를 옭아매는 뒤틀린 욕망들을 비워낼 때, 비로소 상처 입은 마음은 치유되고, 건강하고 생산적인 새로운 욕망을 향해 나아갈 용기와 회복 탄력성으로 다시 일어설 준비를 마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내려놓음의 미학은 불필요한 짐들을 비워내, 진정 우리가 품은 간절한 소망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지혜입니다. 삶의 진정한 원동력은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발현되지만, 때로는 그 소망 성취를 위해 짊어진 불필요한 짐들을 과감히 덜어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지혜로운 '비움'이야말로 우리를 진정한 '채움'과 내면의 '평화'로 이끄는 강력한 힘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