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눈물 흘리는 일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주 극소수만이 그것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면서 자기가 운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실컷 울어서 내 조직 밖으로 몰아냈지.”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시형 번역, 청아출판사, 2007. 141쪽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워낙 유명한 책이지요. 유대인으로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이자 심지학자인 저자가 가족과 함께 나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생활했던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프랭클 박사가 자신의 수용소 체험담은 물론 정신과 의사로서 스스로 창안하고 발전시킨 로고테라피(의미 치료) 내용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 갖은 핍박 속에 죽음의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듭니다. 실제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프랭클 박사의 직계가족 가운데 여동생 한 사람 겨우 살아남고 부모, 형제, 아내가 강제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살아있는 자’의 비애가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프랭클 박사는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요?
맨 앞 인용한 문장들을 통해 그 비결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서 이겨낸 것입니다. 프랭클 박사는 말합니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자제하는 게 좋지만 ‘눈물 흘리는 일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란 겁니다. 오히려 ‘실컷 울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실컷 울어 보셨나요?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게 요즘 우리 현실입니다. 내가 ‘눈물 흘리는 걸 보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해 볼까?’ 하면서 울음을 참습니다. 막상 울고 싶어도 울 곳이 없습니다. 통곡하고 싶어도 통곡할 만한 곳을 찾아내기가 힘듭니다. 강을 찾고, 숲을 찾아가도 만만치 않습니다.
프랭클 박사도 눈물의 의미에 대해 얘기하고 있잖아요.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시련과 고난, 고통을 이겨낼 용기가 눈물에서 샘솟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는 남자인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물론 젊어서는 울지 않았습니다. 아니 울지 않으려 무던히 애쓰며 살았습니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요. ‘울려면 딱 세 번만 울어라. 태어나는 순간,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그리고 나라가 망할 때’만 울라는 것이지요. 어쩌다 친구들과 주먹다짐을 하다가 눈물 찔찔 짜면 사내답지 못하다고 놀림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울고 싶을 때도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살아냈던 겁니다.
근래, 특히 10년 사이에 무척 울었습니다. 딸이 대학생 때부터 몹쓸 병에 시달렸습니다.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입·퇴원을 반복했습니다. 딸이 입원한 대학병원을 오가는 길, 딸 또래 여학생들이 재잘대는 모습을 보며 저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집에 가고 싶어!" 투정 부리는 딸을 떼어놓고 나오다 남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무 부여잡고 울기도 했습니다. 다섯 살짜리 외손주가 갑자기 뇌종양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는 고생을 지켜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의 별로 떠나가면서는 더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감히 비교할 수 없다.” 지금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라니, 처음엔 공허한 말처럼 여겨지더군요. 시련과 고난을 겨우겨우 넘기고 보면 그 말을 조금씩 이해되고, 이해하니 용기를 얻고 소망을 바라며 어려움을 이겨내게 되더군요. 이젠 잘 울지 않습니다. 등잔 심지에 석유가 천천히 배어들어서 나중에 불을 켜면 어둠을 밝힐 수 있듯이 조금 씩이나마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프랭클 박사가 주창한 ‘로고테라피’(의미 치료)는 의미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심리치료 방법입니다. 인간 존재 자체의 의미는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우리가 창조적인 일을 통해서 즐거움을 맛본다면 거기에서 충분히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창의적인 일과 즐거움이 아니라 어떤 시련에 부딪혀도 그 시련은 값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라고 강조합니다.
니체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인생에서 고난이 자취를 감췄을 때를 상상해 보라. 그 이상 삭막한 것이 없으리라.” 우리에게 시련이 없다면, 고난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한결 가벼운 마음이 들겠지만, 황량한 사막에 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길에서 헤매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을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한 도스토옙스키의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프랭클 박사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러면서 다음의 예를 듭니다. 한 여자의 이야기가 한 편의 시와 같습니다.
이 젊은 여자는 자기가 며칠 안에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명랑했다.
“나는 운명이 나에게 이렇게 엄청난 타격을 가한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전에 나는 제멋대로였고, 정신적인 성취 같은 것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녀는 창밖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는 이 나무가 내 외로움을 달래 주는 유일한 친구랍니다.”
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밤나무 가지 한 개와 그 위에 피어 있는 꽃 두 송이였다.
“저는 저 나무와 자주 이야기를 나눈답니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나무가 대답하는지 물었다.
“물론이지요.” 나무가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녀는 말했다.
“나무가 이렇게 대답해요. 내가 여기 있단다. 내가 여기 있단다. 나는 생명이야. 영원한 생명이야.” (『죽음의 수용소에서』, 125~126쪽)
지금 남몰래 눈물 흘리고 계시나요? 이것저것 포기하고 지내도록 만드는 현실이 야속합니다. 굳이 슬픔을 삼키려고 하지 마세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지 마세요. 실컷 울고, 마음껏 토해내세요. 속이 후련해질 겁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이나 고난에도, 우리가 흘리는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에도 참된 의미와 가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강제 수용소에서 끔찍한 인권 유린을 당하면서도 ‘밤나무 가지 한 개와 꽃 두 송이’를 보면서 감사했던 그 여인처럼, 그것을 발견해 내어 자기 것으로 하느냐 못 하느냐는 개개인의 자세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각자 자신의 고난 속에서 광맥의 금광석처럼 멋진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