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차:3.4. 화요일, 흐리다 맑음.
Torremejia ~ Merida ~ Carrescalejo 30 km, 누적 거리 227km
08:20 느지막이 알베르게를 나섰다. 새벽 세 시쯤 깨었다가 한참 뒤에 다시 잠들었던 게 탈이었다. 다시 깨어 보니 일곱 시 반이 다 되었다. 서둘러 짐을 꾸리고 식당으로 갔더니 로리아노가 내 몫까지 우유를 따듯하게 데워놓고 빵을 구워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했다. 토스트 식빵에 잼을 발라 입안에 넣자마자 제대로 씹지도 않고 목으로 넘겼다. 먹었다기보다는 이거 저거 꾸역꾸역 집어넣었다가 그냥 삼킬 뿐이었다.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했다. 단지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굳센 의지의 발현이라고나 할까.
서둘러야 했다. 그래야 미리 짐을 다 꾸려놓고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로리아노에게 덜 미안하지 않을까. 어떻든 그렇게 둘이서 알베르게를 나섰다. 구름이 잔뜩 끼었지만 다행히도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300여 미터나 갔을까. 앞서 가던 로리아노가 배낭을 벗어 내려놓더니 알베르게에 두고 온 물건이 있다고 뛰어간다. 뒤따라 오던 클레멘스가 로리아노에게 손짓을 한다. 알베르게 출입문 열쇠를 그냥 가지고 왔다며 가져다 놔 달라고 한다. 그렇게 하루가 부산스레 시작되었는데, 정작 문제는 이곳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내가 더 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을 씻은 뒤 쉬면서 일기를 쓰려고 보니 안경이 보이지 않는다. 먼저 알베르게에서 서두르다 보니 어딘가에 떨구고 온 것이다. '제발 정신 줄 좀 잡자! 뭔가를 자꾸 흘리고 다니는데 잘 확인하자.' 하는데도 이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물론 이럴 거에 대비해서 집에서부터 예비 안경을 챙겼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까막눈으로 다닐 뻔한 것이다.
Torremejia를 벗어나자 바로 흙길로 들어서는데, 이거 장난이 아니다 싶다. 어제까지 내린 비로 길은 엉망진창이었다. 발을 내디딜 수가 없을 정도로 푹푹 빠지고, 신발에 들러붙는 흙덩이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그대로 진행하기가 곤란했다. 이심전심인지 로리아노도 큰 도로로 가자고 한다. Merida까지는 15km 정도, 지도를 확인해 보니 카미노 루트와 자동차 길이 큰 차이 없이 거의 평행해서 나 있었다. 포장도로를 따라 걷는 것도 쉽지 않으나 진창길을 걷는 것보다는 나았다. 세 시간을 그렇게 쉬지 않고 걸어서 메리다 초입에 다다르니 바르가 보였다. 마침 커피가 당기니 잠시 쉴 겸 카페콘레체를 한 잔 마시고 가자고 했다. 이탈리아노가 어찌 사양하겠는가. 서로 언어는 잘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잘 통한다는 게 신기하다.
Merida는 인구 5만 명 넘는 큰 도시로서 고대 로마시대에 건설된 도시다. 고풍스러운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로마 풍 건물들이 건재하고, 밀라그라스 수도교를 비롯해 고대 로마 유적지는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로리아노와 미리 야기하기를 오후에 비가 내리면 메리다에서 머물자고 했는데 점점 날씨가 개는 듯했다. 다음 동네까지 더 가기로 하고 시내 중심 광장 벤치에 걸터앉아서 빵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웠다.
광장 한가운데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 할 것 없이 어린이는 순수하고 맑아 보인다. 옆에서 놀고 있는 세 아이들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했더니 포즈를 잡아준다. 사진을 한 장 찍고 나서 고맙다고 하니 한 아이가 웃으며 "데 나다 de Nada"라고 한다. 시가지 외곽을 지나는데 산티아고까지 753km 남았다는 표지석이 나온다. 벌써 250여 km를 왔나 하면서도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상반된 마음이 교차한다.
메리다 시내를 벗어나면서는 자연 풍광이 달라졌다. 며칠 동안 지나온 데는 구릉 밖에 없더니 멀리 산도 보이고, 호수가 있어 눈도 마음도 시원했다. 참나무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초장에는 소와 말 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소는 보통 소들이 아닌 듯하였다. 마치 투우장에서 사람들이 내지르는 함성 속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날뛰는 투우 같은 모습이었다. 덩치도 큰 데다 시커먼 털이 햇빛에 윤기를 더해 무척이나 건강해 보인다.
오후 네 시가 되어서야 무니시팔 알베르게에 자리를 잡았다. 오른발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잡혀서 불편했지만 잘 참고 견디며 도착했다. 여자 오스피탈레오(Chelo. 59세)가 반갑게 맞아주는데, 방으로 안내하더니 침대 하얀 시트를 직접 깔아준다. 미안해서 내가 하겠다고 하니 아니라며 모포까지 가져다가 해주는 게 아닌가. 카미노를 걸으면서 알베르게를 수없이 이용하면서 이런 친절을 본 적이 없다. 작은 친절과 호의에도 감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