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차:3.3. 월요일, 오전 비 온 뒤 오후 갬, 기온 8~15도
Billafranca de los Barros ~Torremejia 26km
7시 15분 알베르게를 나서면서부터 비가 부슬거린다. 일단 나서는데 로리아노가 커피부터 마시잔다. 알베르게 근처에는 열린 바르가 보이지 않는다. 한 바퀴 돌아도 마차가지다. 포기하고 그냥 가는데 얼마 안 가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따라가니 한 바르 밖에서 동네 사람들이 모여 커피 한 잔씩 앞에 놓고 수다를 떤다. 바르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나섰던 루이스와 클레멘스가 앉아서 손짓을 보낸다. 역시 둘이 함께 카페콘레체를 주문한다. 부지런히 오가는 주인장의 손길이 재빠르다. 커피가 담긴 유리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니 온기가 온 마음을 풀어주는 듯하다. 이른 아침 커피가 하루 힘을 비축해 주는 걸까. 커피 한 잔을 마시지 못하면 하루 걸음걸이에 힘이 생기지 않는 것 같다. 이탈리아노랑 움직이는 탓인가.
오늘 목적지까지 26km 구간은 단 하나의 마을도 없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도 그럴 곳도 없고, 배가 고파도 음식을 사 먹을 곳이 없다는 걸 뜻한다. 힘들어도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서 쉴 곳조차 없는 길이다. 어제저녁 함께 하는 친구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마트를 찾아 나서고, 먹을거리를 준비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바르를 나서는데 비가 쏟아진다. 어쩔 수 없이 우의를 꺼내 착용한다. 판초를 걸치면 무슨 영상이나 사진에서 보는 듯한 진짜 순례자의 모습이다. 오늘 걷는 길의 풍경은 어쩌면 이럴까 싶을 정도로 변화가 없다. 고도 차나 높낮이의 변화 없이 대평원, 그 사이로 길게 뻗은 길이 지루하다시피 이어진다.
어쩌다 보이는 올리브 밭 외에는 전부 포도밭이다. 저 크고 많은 포도밭농사를 어떻게 지을까 궁금증이 생긴다. 나무를 심고 기르고 거름을 주는 것은 기계로 한다 해도 매년 전지를 하고 열매를 솎아주는 일고, 수확철에 때맞춰 포도를 따는 일은 어차피 사람이 해야 할 터인데, 일손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물론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농촌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우리 한국의 사정이나 환경과는 너무나 다르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 상상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포도밭이 방치되어 있거나, 농사를 포기하고 포도나무를 아예 뿌리째 뽑아버린 밭을 여러 군데서 보았다. 올리브 나무 밭이 아주 일부였고 거의 다 포도 밭이었는데, 그렇게 포도 농사를 그만두는 듯싶은 데가 얼추 짐작하건대 20 퍼센트 가까워 보였다.
포기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는 전환이요, 둘째는 완전 포기다. 전환은 예컨대 포도 농사로는 이익이 남지 않거나 해 봤자 손해가 되므로 경제성 있는 다른 작물로 바꾸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보았듯이 요즘 와인 경제가 다소 침체되었다는 보도가 연이어 나오는 현장을 확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어제 본 것처럼 태양광 사업 등으로 바꾸는 경우이다. 다른 작물 재배를 위한 전환도 아니고, 태양광 등 신 사업으로 전환하는 것도 아니라면 '완전 포기' 일 텐데, 다른 뾰족한 대책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농촌이 처한 현실을 보는 듯해 안타까울 뿐이다. '포기'가 다른 작물이나 신사업으로의 전환이든 완전 포기든 간에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기회라는 것이다. 이 기회를 잘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하면 먼저보다 대성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적절한 시기에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지혜이며 용기이다.
오후 1시 반에 오늘 머물고자 하는 Torremejia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하기 30분 전에야 비가 잦아들었다. 질퍽거리는 길을 다섯 시간 동안 쉬지도 못한 채 걸어야 했다.
내내 비를 맞고 걷다가 오늘의 목적지 Torremejia가 멀리 보이니 힘이 솟는다.
Albergue Rojo Plata 16유로, 아침 식사 포함, 비에 젖은 옷이나 양말, 빨래를 말릴 수 있도록 온풍기와 비키니 옷장과 비슷한 캐비닛이 비치되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