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티보 길 12일 차 / 10월 7일(토), 맑음
오 페드로우소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 19.3km, 누적 거리 767.1km
새벽 6시가 채 안 되어 알베르게를 나섰다. 아침 6시면 해뜨기 두 시간 반 전, 날은 어두운데 순례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대지에 울려 퍼졌다. 오 페드로우소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약 20km 구간에는 훅 하는 기운이 가득했다. 순례자마다 머리에 찬 램프 불빛이 번쩍이고, 뜀걸음이라도 하는 듯 빠른 걸음으로 걷는 순례자들이 내뿜는 열기에 새벽 공기가 데워지는 듯했다. 마치 학생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삼삼오오, 끼리끼리, 아니면 어쩌다 혼자서 산티아고로 입성하는 마지막 발걸음이기에 순례자들의 발걸음은 가볍고 힘차 보였다.
카미노를 점령하기라도 한 것처럼 서너 명이 옆으로 늘어서서 걷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을 지나치기 어려워 발길을 늦추다 보면 어느새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다른 순례자들, 그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했다. 순례자들의 들뜬 듯한 대화 소리가 꽤 신경 쓰이게 했다. 조용히 묵상하며 걷고 싶은 나에게는 자극적이었다. 조금 한적해지면 주기도송을 읊조리기도 하고 묵상을 했다.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가, 무슨 목적으로 산티아고에 가겠노라 노래하다시피 했는가.' 몇 시간 뒤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이 수제자인데, 그중 한 사람인 야고보 사도의 유골이 묻힌 곳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다. 중세 때부터 야고보 사도를 경배하고자 하는 순례자들이 몰려들던 산티아고, 나도 지금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
아기별이 된 내 사랑하는 손자 시후가 묻힌 곳은 어디일까. 지금쯤 시후 별은 어디를 비추고 있을까. 새벽길 위에서 시후와 나직이 대화를 나누었다. "시후야. 네가 보고 싶구나. 네가 너무너무 보고 싶단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 나에게 시후가 말하는 듯했다. "할아버지, 이제 그만 우세요. 제가 보고 싶어도 이젠 울지 마세요. 저도 이제 중학생 별이 되었어요. 형이 곧 고등학교에 가듯이 저도 얼마 안 있으면 고등학생 별이 될 거예요. 저도 어엿한 별이 되었어요. 할아버지, 그러니 그만 우세요." "그래, 그렇구나. 네가 어언 중학생 별이 되었지. 이제는 내가 너를 놓아줘야겠구나. 그래야 너도 편하겠지. 아무쪼록 하늘에 빛나는 예쁜 별이 되어주렴. 그래서 네 엄마의 병도 낫게 해 주고, 이 세상 밝게 비춰주렴. 네가 보고 싶어도, 못내 그리워도 이제는 울지 않으마. 그래, 그래야지."
새벽길을 걸으며 시후와 나눈 대화 속에서 나는 비로소 답을 얻었다. 이젠 그만 울어야겠다. 그것이 아기별에서 중학생 별이 된 내 사랑하는 손자 시후를 진정 자유롭게 해 주는 길이리라. 산티아고로 들어가면서 비로소 얻은 이 답이 정답인지 오답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애통해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성경 구절이 있지만, 위로를 받고 싶어 카미노 위에 선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애통해하는 자'로서 카미노를 걸으며 기도와 묵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슬픔과 그리움을 하늘에 호소한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두 번째 마주하는 산티아고 대성당, 십 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성당 앞 오브라도이로 광장 여기저기서는 순례자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감개무량한 듯 기뻐하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어떤 이는 배낭을 멘 채 광장 바닥에 큰 대 자로 마냥 누워 있었다. 나름대로 순례 완주에 대한 안도와 감격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리라.
60살에 30일 만에 프랑스 길을 완주했던 내가 70살이 되어서도 프랑스 길을 걷다가 좀 더 어렵다는 프리미티보 길로 바꿔서 30일 만에 완주했으니 왜 뿌듯함이 없겠는가. 하지만 길이나 알베르게에서 만나는 순례자들 가운데 나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이 상당수였다. 그러니 나의 카미노 성공은 크게 내세울 만한 일이 아니었다.
십 년 전에는 열두 시에 순례자들을 위해 드리는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 미사에 참석했었다. 초대형 향로가 움직이는 장관을 보고, 지하에 있는 야고보 사도 유골함을 지나 제단 뒤편에 올라가 야고보 흉상을 안아보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런 절차를 모두 생략하고 순례자 사무실로 곧장 찾아가 인증서(콤포스텔라)를 발급받자마자 기차역으로 향했다. 라 코루냐(A Coruña)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가서 로마 시대에 건축된 등대를 구경한 뒤 묵시아(Muxia)와 피스테라(Fisterra)까지 걸어서 가려고 한다. 나의 카미노는 산티아고에서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갈 또 다른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파이팅! 새벽길, 별이 된 손자와 나눈 가슴 시린 대화는 산티아고로 향하는 마지막 발걸음에 큰 위안과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