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대하는 자세
8월 28일 오전 9시, 오색에서 대청봉을 향하는 발걸음은 시작부터 숨 막히는 오르막을 마주한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숨을 고를 때, 문득 이것이 비단 산의 경사 때문만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어쩌면 삶의 어느 고비에서 턱 막히던 순간들이 무의식 중에 재현되는 것인지. 그때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며 한 발을 더 내디뎠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걷는 동안, 이마와 얼굴에서 흐르는 땀은 지난 세월 겹겹이 쌓인 미련과 욕심을 씻어내는 정화의 물방울 같았다. 땀 한 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적실 때마다 내 마음도 조금씩 비워지는 듯했다.
급경사로 이어지는 부정형의 돌계단은 삶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딛는 자리마다 높낮이가 다르듯, 예상치 못한 시련과 우연한 행운이 교차하는 것이 삶의 길이 아닌가. 내 능력껏 최적의 자리를 찾아 딛는 과정 자체가 곧 지혜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힘들여 오르다 문득 길가에 피어난 작은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모싯대, 이질풀, 투구꽃, 진범... 험한 돌 틈에서도 기어코 피어난 그 작은 생명들은, 포기하고 싶었던 내 안의 또 다른 '나'에게 건네는 무언의 격려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움은 가장 힘든 곳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는 법임을 그들은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눈잣나무들의 모습이 든든하게 다가온다. 그들은 높이만 추구했던 지난날의 나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는 듯했다. 높이가 기껏해야 1미터 내외로 자란다는 이 나무는 세찬 바람과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한껏 몸을 낮추고 있었다. 버티는 힘은 곧 유연함과 조화를 배우는 데서 온다는 깨달음이었다. 재목 구실을 못할지라도 열매를 잣까마귀에게 내어주며 공존하는 모습은, 모든 것을 소유하려 했던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일깨워주었다.
정상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발걸음은 오를 때보다 한결 가볍다. 꼭 내리막길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홀로 산행을 하는 나에게 길가에 피어난 작고 여린 꽃들이 친구가 되어 위로해 주고, 험난한 봉우리에서 꿋꿋이 제 자리를 지키는 눈잣나무의 의연함을 보면서 조금이나마 유리병처럼 깨지기 쉬운 내면을 다지는 기회를 가진 덕분일 것이다.
다시 설악산을 오르며, 가파른 오르막처럼 힘든 순간에도 기어코 피어나는 생명의 아름다움과, 스스로를 낮춰 세상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존재들의 지혜가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이제 이 산에서 얻은 고요한 깨달음과 넉넉한 기운으로, 삶의 또 다른 길 위에서 겸손하고 의연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싶다. 그리고 그 발걸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조용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