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사랑마저도 뛰어넘는가
킬리만자로, 아프리카의 지붕이라 불리는 웅장한 산이다. 어떤 이는 자유를 찾아 그곳으로 향하며, 어떤 이는 삶의 의미를 묻기 위해 그 정상에 선다.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하나의 질문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과연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인 자유는 사랑마저도 뛰어넘는 것인가? 혹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시작인가?
박범신 작가의 『킬리만자로의 눈꽃』은 이러한 질문의 해답을 찾아 떠난 어느 여인의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여정을 그려낸다. 남편의 그늘 아래서 자신을 잃었던 그녀의 독백은 선명히 가슴에 박힌다.
"킬리만자로는 이제 내 가슴에 선연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아침이면 맑게 갠 마웬지 봉우리를, 한낮엔 구름 낀 키보 봉우리를 나는 아프리카에서가 아니라 바로 내 가슴속에서 보았다. 그리고 킬리만자로를 내 가슴에서 볼 수 있는 한, 나는 홀로 있어도 나의 고독과 그리움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이 문장에는 한 여인의 삶을 옥죄던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에서 나온 독백 치고는 간과할 수 없는 힘이 촘촘히 배어 있다. 소설 속,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설가 정영화를 찾아 나선 그의 아내 가슴에 우뚝 선 킬리만자로 우후루 피크가 선연하게 그려진다.
킬리만자로는 아프리카의 지붕이자, 마웬지(Mawenzi) 봉과 쉬라(Shira) 봉을 품은 해발 5,895m의 키보(Kibo) 봉이다. 이 산은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이겨낸 아프리카인들의 자유를 웅변하듯, 키보 봉에는 '자유'를 뜻하는 '우후루 피크'(Uhuru Peak)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이름 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헤밍웨이가 1938년 발표한 단편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은 아프리카 초원을 누비던 표범이 어찌하여 그 높은 킬리만자로 봉우리까지 올라가 얼어 죽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진다. 작가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으나, 이 미스터리는 오히려 킬리만자로를 전 세계인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가수 조용필이 1985년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노래한 후로, 자유를 향한 거대한 꿈이 깊이 스며들었다. 조용필은 지금도 우리에게 노래한다.
"묻지 마라 왜냐고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어떠리" (<킬리만자로의 표범>,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
어쩌면 표범이 왜 그 높은 곳에서 죽음을 맞았는지 굳이 따지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저 고독을 이겨내려는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노래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인간은 누구나 꿈을 꾸며, 그 꿈은 현실과는 다른 빛깔을 지닌다. 현실 아닌 세계를 현실로 빚어내는 한 작가의 시선을 잠시 들여다본다.
소설가 박범신은 킬리만자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기 위해 무려 두 번이나 킬리만자로를 올랐다고 한다. 작품을 구상하고, 그 속에 배경과 인물을 심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은 아마도 킬리만자로의 숨 가쁜 오르내림 속에서 얻었을 것이다. 그에게 킬리만자로는 단순히 소설의 배경이 아니라, 창작의 고통을 겪고 진실을 탐구하는 자아를 담금질하는 뜨거운 용광로였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박범신은 인기 소설가 정영화의 의문스러운 실종 사건을 중심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 애인의 시점을 오가며 각자의 내밀한 심리적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정영화는 왜 그토록 멀리 아프리카 킬리만자로까지 가야만 했을까? 아마 그를 짓누르던 감성의 고갈, 시대의 어둠을 외면한 채 사랑 이야기나 해야 하는 자괴감 같은 것들이 그의 등을 밀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도 크고 작은 정영화의 모습이 있는지도 모른다. 익숙한 안락함 속에 안주하며 내면의 불꽃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낄 때, 진정 나를 찾아 떠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지는 않는가? 그는 결국 진정한 자신을 찾아서 킬리만자로로 떠났고, 자유를 향해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였다.
정영화는 탄식한다. '인기 작가는 밀실에만 있을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이라고. 소설 속 소설 <황야에서>의 마지막에서 그는 자신을 옭아매는 세상의 온갖 사슬을 끊어내고픈 갈망을 내비친다.
"언제까지나 죽은 고기나 찾아다니는 삶을 온몸으로 거부하라. 무리에서 떨어져 결국 죽음을 만날지라도 일상의 탐욕이나 쫓아가는 그 무리를 버리라. 더 넓고 깊은 세계를 가기 위해 온갖 인정의 사슬에서 참으로 자유로워지리라." (200~201쪽)
정영화는 이 말을 남기고 자유를 찾아 킬리만자로로 향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정영화가 바로 이 소설을 쓰고 나서 "나의 상상력의 우물은 말랐다"며 절필을 선언했던 박범신 작가의 분신이라는 추측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뜨거운 불꽃을 품고 있다. 자유를 향한 갈망이 그 불꽃처럼 활활 타오른다. 단지 그 불꽃을 억제하느냐, 활활 태우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정영화는 자신 내면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어, 마침내 킬리만자로의 작은 마사이족 마을에 숨어들어 자유로운 삶을 살아간다. 평범한 주부에 지나지 않았던 그녀. 실종된 남편을 찾아 헤매던 그 고단한 길 위에서, 그녀는 예상치 못한 진실과 마주한다. 이전까지의 삶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오로지 남편의 그림자였고, 한 남자의 아내라는 틀 속에 갇혀 있었다는 것. 혹시 우리 역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의 '이름'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녀는 지고지순한 사랑이라 믿었던 지난날의 삶이 사실은 자신을 지우는 허상이었음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그 어떤 세계도, 그 어떤 사랑도 그이가 전에 말한 바 있었던 '고유명사로서의 자기 세계'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해 뜨는 아침녘의 목련나무 그늘에 매달린 이슬방울 같은 것, 삶의 한낮이 되고 나면 이슬방울은 형체조차 없을 터인데도 그 허상이 '지고지순하다' 믿으며 나는 다만 사랑이라는 포장지로 싼 '짐'이 되어 그의 어깨에 얹혀 있었던 것이다."
자유를 찾아 흔적 없이 사라진 남편을 뒤쫓으며 그녀가 깨달은 것은, 결국 자신을 옥죄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진리였다. 실종된 남편을 찾아 나선 여정에서 잊었던 자아 정체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자유를 찾았다고 할 수 있을까.
자유는 사랑을 넘어선다고,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그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자유는 소중하며, 생명 그 자체와 같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가 넓혀지는 과정이었다. 개인과 사회의 자유는 그 무엇으로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다. 그 누구도, 어떤 체제나 국가도 자유를 제한하거나 침해할 수 없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자유를 제한받는다면,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소리 높여 주장하고, 때로는 투쟁해서라도 되찾아야만 한다. 생명까지 내놓으며 자유를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가 숭고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킬리만자로는 아프리카인들의 자유를 염원하는 산이자, 온 세상 사람들의 자유를 품은 거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그의 아내와, 심지어 그의 연인에게까지 진정한 자신과 자유를 찾아 나서라고 권했던 정영화의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 고스란히 다가온다. 나는 누구이며, 왜 킬리만자로에 올라 고독을 씹어야 하는가?
나 역시 2017년 킬리만자로를 등반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높이 오를수록 산소가 희박해져 극심한 고산증에 시달렸다. 여덟 번이나 토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기어이 우후루 피크 정상까지 올랐다. 오르내리는 내내 푸른 초원의 포식자였던 표범이 왜 그곳을 벗어나 킬리만자로 꼭대기까지 올라 죽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헤밍웨이도 소설 첫머리에서 말했듯, 그에 대해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고, 나 스스로도 명확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영원처럼 느껴졌던 고통의 끝에서 마주한 킬리만자로 정상, 눈꽃송이 하나 녹아내릴 듯 짧았던 그 순간 속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고산 정복의 쾌감이 아니었다. 온몸으로 자유의 숭고함을 경험하고, 그것을 내 삶의 가장 깊은 곳에 화인처럼 새기는 순간이었다. 자유는 그렇게, 필자에게 생명 그 이상의 가치로 다가왔다.
표범은 왜 푸른 초원을 등지고 킬리만자로 정상에 올라 얼어 죽었을까? 정영화는 왜 킬리만자로 어귀로 숨어들었을까? 그 아내가 되찾은 정체성의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이 질문들은 단지 소설 속 인물이나 헤밍웨이의 표범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삶의 어느 순간,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아닐까? 사상으로부터의 자유, 소유나 탐욕, 그리고 속물근성으로부터의 자유, 고정관념과 상투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루한 일상으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 본연의 욕구는 언제라도 활화산처럼 우리의 가슴속에서 분출되려 하고 있다.
다시 킬리만자로에 오르고 싶다. 비록 발끝이 시리고 숨이 턱 막혀도, 그 고통의 순간 너머에 있는 온전한 자유의 한 순간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한번, 삶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온몸으로 답하고 싶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오르고 있는가? 당신의 킬리만자로는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