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으로 만지는 행복, 놓치고 마는 행복 –
나는 행복했으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경험할 때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법이다. 행복이 지나가고 나서야 – 어쩌면 놀라움으로 – 문득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이 크레타의 해변에서 나는 행복했을 뿐 아니라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의 자전적인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이와 같이 말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순간의 행복을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그때가 행복이었지’ 하고 되뇌곤 합니다.
당신은 어느 때 제일 행복하세요? 행복은 손에 닿을 듯 가깝다가도 쉬이 사라지는 몸매 미끈한 도마뱀과 같습니다.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에서 놓치듯이, 만질 듯하던 행복이 어느새 빠져나가 버립니다. 목이 말라 두 손에 가득 뜬 물이 손가락 틈새로 새 나가듯, 행복 또한 허무하게 놓치곤 합니다. 한참 뒤에야 ‘그때 그게 행복이었구나’ 하며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행복을 만끽하는 일은 매우 드문 행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지금 행복한가?” 하고 물어봅니다. 강연장이나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면, “네, 행복합니다.”라고 답하는 이는 가물에 콩 나듯 드물더군요. 대다수는 눈치를 살피며 침묵하거나, 아예 표정이 굳어지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런 질문에 자신 있게 행복하다고 대답할 처지가 못 되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섣불리 답하거나 모두가 공감할 만한 정의를 내놓기란 쉽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부터 오늘날까지 행복이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의 꾸준한 연구 대상이었다는 점은, 그것이 단순하지 않은 문제임을 방증합니다. 소크라테스 이래 행복이 모든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 천명된 뒤로 수많은 철학자가 서로 다른 정의를 내놓고 여러 방법을 제시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행복을 위해서는 그만큼 험난한 길을 마다해서는 안 된다는 역설 또한 가능할 것입니다.
요즘에도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행복에 관한 학문적 연구를 꾸준히 합니다. 각종 평생 학습 기관에서는 행복한 인생을 위한 강좌가 개설되어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방송 매체에서는 그런 강연 프로그램을 앞세워 시청률을 끌어올립니다. 흔히 행복이라는 감정은 일상에서 아주 소중하지만, 잠시 느끼는 듯하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는 속성을 지닙니다. 저는 여기서 행복이란 무엇이며, 행복해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는 이론적인 문제를 다루지는 않으렵니다. 다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말한 “행복은 지나간 뒤에 깨닫는다.”라는 문장을 놓고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1935~2004)은 말했습니다.
“내게 행복이란, 건강한 체력과 두려움 없이 잠드는 것, 그리고 조바심 없이 깨어나는 것에서 오는 기쁨을 말한다.”
아주 소박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대작가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하지만 아프지 않은 몸으로 체력을 유지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었다가 아침에 기지개를 켜며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지요. 사강이 말하듯 매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고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야기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이란 말도 떠오릅니다.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2018년 우리 사회 10대 소비 동향 중 하나로 꼽을 정도로 큰 유행이 되었었습니다. 실제 일상에서 누리는 소소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바람이 우리 사회에 몰아치기도 했습니다. 하루키가 ‘소확행’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에세이 『랑겔한스섬의 오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하루키가 갓 구운 빵 한 조각을 손으로 뜯어먹으며 행복을 만끽하는 표정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듯합니다. 행복은 거창하거나 멀리 있기보다 사강이나 하루키가 말하듯, 우리 일상에 들어와 언제든 경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행복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라고 말하면 비약하는 걸까요? 사강이나 하루키가 말하듯이 행복이 우리 피부로 느끼고 만질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라면, 마음 바구니에 행복을 가득 담아 놓고 수시로 꺼내 만지작거리며 즐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만지는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얼마 전 아내와 딸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얼마 전 아내는 딸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딸에게 언제 제일 행복했냐고 묻더군요. 딸은 몇 년 전 어린 아들을 뇌종양으로 잃은 아픔을 품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하는 딸에게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아내에게 핀잔을 주면서도 과연 딸이 무어라 답할지 궁금했습니다. 딸은 "두 아들이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장난감 갖고 노는 모습을 볼 때 꽉 찬 행복감을 느꼈는데, 이젠 다시 그런 행복은 맛볼 수 없어 너무 슬프다."라고 말했습니다. 딸의 말을 듣고 저는 아린 마음을 저만치 밀쳐두고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되짚어보았습니다.
다섯 살밖에 안 되는 외손주가 두개골을 절개하는 수술을 몇 차례 반복해서 받는 동안 무너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힘들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막상 녀석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뒤돌아보니, 녀석이 병원에 있을 때 그 얼굴 보려 만원 전철 타고 단숨에 병원으로 달려가던 그때가 참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재의 아픔을 겪으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나날들 가운데 미처 느끼지 못했던 행복을, 광맥에서 금덩이를 캐내듯 떠올리는 것 또한 하나의 행복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가장 행복해!”하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 한참 지나서 생각해 보니 ‘그때가 행복했지.’, ‘그래, 바로 그게 행복이었어!’ 하고 되뇔 수만 있어도 좋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앞으로는 행복할 거야!’라든가,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하고 말할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 있는 존재와 이 글을 보는 모든 독자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