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과 조산만 반복하던 나도 출산을...
"뽁"
"방금 그 소리 들었어?"
"아니, 무슨 소리? 못 들었는데."
출산 예정일을 하루 앞둔 날, 저녁 9시.
신랑과 나란히 누워 TV를 보고 있는데, 비눗방울 터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비닐 같은 것의 매듭이 풀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얼른 화장실로 가서 확인해 보니 소량의 양수가 흘러나와 있었다.
신랑은 얼른 병원으로 가야 한다며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고, 나는 샤워를 하고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이를 낳으면 당분간 씻기 힘들 텐데, 찝찝해서 어떻게 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양수가 터지면 세균이 침입할 수 있으니 되도록 서둘러 병원으로 오세요.'라고 말하던 의사의 얼굴도 기억났다.
신랑은 긴장을 많이 했는지,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보다 더 열심히 심호흡을 했다. 내가 아닌 신랑이 출산하러 가는 것만 같아서 웃음이 났다. 그런데 신랑이 갑자기 차 문을 열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신호등이 빨간 불인 게 안타까웠나 보다. 정차되어 있던 몇 대의 차 운전석 창문을 두드리며 우리 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서게 했다. '아니! 이 사람이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난 이 상황이 재미있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병원에 도착하니 바로 가족 분만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제모를 하고, 내진해 보니 자궁이 2 cm 열려 있었다. 양수의 양은 정상이었고, 아기의 머리도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엄마는 준비가 됐어. 래몽아! 우리 함께 힘내 보자!' 뱃속의 아기에게 열심히 말을 걸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진통이 아프고 힘들기는 했지만, 행복했다.
출산을 위한 모든 사전 준비를 마쳤고, 도착한 지 2시간 만에 간호사가 무통주사를 놓아주었다. 30분 후 분만실로 들어온 의사는 그렇게 참기 힘들었냐며 핀잔을 주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의사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다른 산모들에 비해 내가 무통주사를 일찍 맞은 것 같았다.
'아니, 나는 무통주사를 놓아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요. 그런데 무통 천국이라는 말이 왜 있는지 알겠네요.'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좋았다. 무통 주사 덕분인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진통이 좀 편안해졌다. 그래도 내가 진통을 할 때마다 신랑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내진 후 자궁이 5 cm 정도 열렸을 때, 간호사가 와서 내 얼굴에 산소마스크를 씌워주었다. 진통이 올 때마다 아이에게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아이가 힘들어한다는 거였다.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 엄마와 함께 힘을 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래몽아! 우리 힘내자.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엄마가 무척 오랫동안 기다린 거 알지? 우리 아가 얼른 보고 싶다.'
새벽 4시, 자궁이 7 ~ 8 cm 열렸다. 드디어 무통주사를 빼고, 강한 진통을 느끼며 서서히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아이를 배 속에 담고 침대에 누워 마음 졸이던 10개월의 여정을 드디어 마치게 되는구나, 생각하니 감격스러웠다.
곧이어 덩치가 산만한 간호사가 침대 위로 올라와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섰다. 두 손을 다리 쪽으로 향한 후 모든 몸무게를 실어 손바닥으로 내 배를 찢을 듯 아래로 쓸어내렸다. '악' 소리가 절로 날 만큼 너무 아팠다. 이대로 죽겠다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결말을 아는 드라마이기에 참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래몽이는 예정일 새벽 5시 55분에 태어났다. 임신 기간 내내 볼록 솟아오른 배에 손을 얹고 말했던 엄마의 바람을 들어준 걸까?
"래몽아! 11월 22일이 예정일이야. 이날 딱 맞춰서 나오면 좋겠어. 보고 싶다, 내 아기"
내가 고령의 산모였기에 '아이 낳을 때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을 하는 지인들이 많았다. 힘들게 출산한 분들에 비하면 수월하게 낳은 편인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힘들지 않은 출산이 어디 있을까? 다만, 나는 아이를 오래 기다린 만큼 아픔은 덜했고, 기쁨은 배로 컸다. 그 아이가 태어난 지 6년 하고도 8개월이 지났다. 래몽이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꼬마 학생이 되었다.
벌써 청소년처럼 의젓해진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는 여섯 아이의 몫을 살고 있다. 임신 7주 유산을 시작으로, 임신 20주 조산까지 나는 다섯 아이를 보내며 참 많이도 울었다. '이제 그만하고, 내 삶을 살아야겠다. 이대로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다.'라고 생각하던 차에 꿈처럼 온 아이가 래몽(來夢)이다. 래몽이는 우리 부부의 꿈을 이루어주었다.
나는 결혼 후, 임신 준비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해서 직장에 다닐 수가 없었다. 대신 개인 수업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이들의 꿈과 미래를 돕고 있다는 생각에 자부심이 컸다. 하지만 나에게 사정(임신, 유산, 조산 등)이 생길 때마다 학생들의 공부를 미루게 할 수는 없었다. 매번 학생과 부모님은 괜찮다고, 몸 추스르면 다시 공부하자고 말씀하셨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 입장만 생각하며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나에게 천직과도 같았고, 삶의 활력소였다. 그래서 그만둔다는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몇 번 더 반복될지 모르는 일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내 인생이 중요한 만큼 학생들의 인생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 욕심만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꿈같은 아이를 낳았지만, 내 꿈이었던 일은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나는 엄마가 되었고, 엄마의 삶을 사는 동안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경험해보지 못했을 너무 값진 삶을 살고 있다.
래몽이가 성장함에 따라 나도 함께 쑥쑥 자란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성장할지 궁금하다. 그래서 육아가 그리 힘들지만은 않다. 아이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참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