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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 Nov 23. 2023

나에게 쓰는 용서의 편지

'힘들어'라는 말을 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니?



선아에게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여름내 지쳐있던 몸과 마음을 말끔히 닦아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이야. 이런 날에는 무릎까지 햇살이 닿는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친구와 수다를 떨고 싶어 져.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아줌마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아직 소녀이고 싶은가 봐. 


문득 어렸을 때가 생각난다. 부모님은 예의범절 교육에 철저하셨지. 그중 인사를 최고로 여기셨어. 그래서 동네 어른을 만나면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인사를 했고, 하루에 여러 번 만나도 그때마다 인사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지. 그 덕에 우리 네 남매는 동네에서 인사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나는 칭찬의 달달함에 빠져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을 살았어. 


네 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나는 뭐든지 스스로 해야 했어. 당연히 동생들 돌보는 것도 내 몫이라고 생각했지. 부모님이 들에 일하러 가시면 동생들을 돌보며, 함께 놀았지. 부모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밥을 해놓고 기다리는 착실한 큰 딸이었어.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하라고 하는 것은 꼭 했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절대 하지 않는 모범생이었지. 착하게 행동하고, 바르고 행동한 후 받는 칭찬과 선행상은 나를 뿌듯하게 했어. 가슴속에 솜사탕이 가득 찬 것 같이 달콤했지. 


중학생 때 소풍 가기 전날, 엄마와 함께 외출했다가 엄마 친구를 만났던 거 기억나니? 엄마는 친구에게 대뜸 이런 말씀을 하셨었지. "선아는 내일 소풍 가는데, 옷 사달라는 말도 안 하는 아이야. 얘가 이렇게 착해. 옷 사주려고 내가 억지로 데리고 나왔어." 난 그때 매일 고생하시고, 힘들게 일해서 돈을 버는 부모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무척 고단해 보였거든. 그런데 내 속마음은 또 그렇지도 않았나 봐. 엄마가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새 옷을 사주신 게 정말 기뻤거든. 


20대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도 생각이 나. 평소에는 연락을 잘 안 하다가 몇 달에 한 번 전화해서 온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있게 한 친구도 있었지. 그런 날은 어김없이 남자친구와 다퉜거나 헤어진 날이었어. 그 친구는 전화를 끓을 때까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하소연했었어. 그 당시에는 타인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며, 위로하는 일이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겼어. 그래서 내 시간을 내는 게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지. 고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도움을 청하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일처럼 아파하고, 잠을 못 자는 일이 많았어.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어야 내 마음이 편했거든. 


난 대학생이 된 시점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생활했어. 처음에는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점점 친구들과 노는 게 재밌어서 자취를 하게 됐지. 한 달 용돈 30만 원으로 버스비, 식비, 통신비, 공과금 등 모든 생활비를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어. 하지만 그 생활이 행복했찌. 부족한 용돈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충당했기에 절약하는 습관에 자연스럽게 몸에 뱄던 것 같아. 


대학 3학년 때부터 남동생과 함께 살았지. 그때까지 처음으로 혼자 살면서 조금은 외롭고, 힘들다는 생각을 했었잖아. 혈육은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물리쳐주었고, 마음을 포근하게 했어. 그 후 6년 터울의 여동생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같이 살게 되었고, 곧이어 막내도 합류해 우리 남매는 완전체로 함께 생활하게 되었지.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첫째로 태어나 부모님께 가장 많은 사랑과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시간이 흘러 20대 후반이 되었을 때, 친구가 집과 차를 사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나보다 수입이 적은데, 친구는 그 나이에 하나씩 척척 갖추어 나가는 것을 보니 참 부러웠지. 그건 친구가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수입의 전부를 저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알아. 나도 친구처럼 집도 사고, 차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겠지만, 동생들과 함께하는 생활을 선택한 거야. 그건 나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했기에 멈출 수는 없었지.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고, 생활을 챙기며 복작복작 함께 사는 게 정말 행복했거든.


행복하고 즐거운 삶의 이면에 고단함은 분명히 존재해. 하지만 나는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못 하는 어른이 되었지. 힘에 부칠 때마다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나 자신을 타일렀고, 내가 싫다고 말했을 때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더 심각하게 고민했지. 내가 원하는 것보다 타인의 시선을 더 신경 쓰는 삶을 사는 줄은 몰랐던 거야. 그저 내가 착하고, 바른 사람이라 그렇게 사는 줄 알았고, 그것에 만족했지. 


타인이 나를 아프게 하고, 나의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할 때, 나는 당당하게 말했어야 했어. 나도 상처받고 나도 힘들 때가 있다고 말이야. 당신이 생각 없이 던진 그 한마디 때문에 밤새 잠을 못 자고 고민했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하라고 말했어야 했어. 그런데 참았지. 나는 참고 또 참았어. 어른이 되지 못했던 나는 내 마음보다 상대방의 마음이 더 중요했고, 상대방의 편의가 우선이었어.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게 싫었던 거지.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는 내 마음이 곪는지도 모르고, 계속 쌓고 또 쌓았던 거야. 아니! 모른 척했어. 그냥 그렇게 덮어두면 되는 줄 알고, 계속 내 마음을 모르는 척한 거야. 






나에게 보내는 용서의 편지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한 거 용서할게. 그때는 나보다 타인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는 걸 알았으니 타인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어른이 되길 바라. 


무조건 참으라고 한 것도 용서할게. 그때는 시끄러워지는 게 싫었고, 관계가 불편해지는 게 싫어서 그런 거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내 잘못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오해였다고 당당하게 말하길 바라. 


모든 것을 혼자 하게 한 것 용서할 게. 그때는 '타인을 불편하게 하느니 내가 하고 말지'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해서 그랬어. 하지만 이제는 함께 하자고 말하거나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위임하길 바라.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지 못하게 한 것 용서할게. 그때는 거절하는 게 힘든 사람이어서 그랬어. 하지만 이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 


힘들다는 표현을 하지 못하게 한 거 용서할게. 그때는 내가 짊어진 삶과 희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누구나 다 그렇게 산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힘들면 힘들다고, 괜찮지 않으면 괜찮지 않다고 말하길 바라.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나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왔어. 타인이 싫어하는 것, 불편해하는 것을 하지 않으려 애쓰는 삶을 살았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바른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이제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말고, 나의 내면의 소시를 들으며 나를 위한 삶을 살길 바라. 타인과의 트러블이 없는 삶이 행복한 게 아니라 트러블을 생겼을 때 그것을 잘 해결하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하는 삶이 더 행복하다는 걸 잘 알잖아. 


배려라는 단어를 남에게만 쓰지 말고, 나에게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나를 홀대하면 타인도 나를 홀대하게 되어 있어. 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 주겠니? 나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밤새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무섭게 쏟아졌는데,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하늘이 아주 맑아.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니? 고난의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한 삶을 살게 되잖아. 내 마음이 거친 풍파를 잘 견뎌내기 때문에 더 단단해질 수 있는 거야. 기초가 단단하니 뭘 해도 잘할 수 있겠지. 단단한 내 마음에 작은 씨앗을 뿌려, 뿌리 깊은 나무로 키워보자.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될 때까지 힘내보자. 


그럼 안녕. 

가을의 문턱에 서서

너를 응원하는 나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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