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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Jul 07. 2020

영화 <야구소녀> 리뷰

<야구소녀>. 이 영화는 거대한 벽 앞에 선 작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소녀가 아니더라도, 세상이 날 밀어내기 위해 없던 서류 심사도 만들어내는 듯 느껴질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영화 속 대사처럼, 여자만 프로에 입단하기 어려운 건 아니니까. 복도에 주욱 늘어선 고교 야구부 선수들 중 스카우터에게 지목당한 건 단 한 명이었다. 주수인만 주수인인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영화에 등장하는 비중 좀 있는 인물들은 죄다 ‘주수인스러운’ 면이 있다. 자꾸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가수 지망생, 프로 입단에 끝내 실패한 변두리 고등학교 야구 코치, 공인중개사 시험에 계속 떨어지는 자식 둘 딸린 아버지, 반백수 남편에 두 딸까지 홀로 부양하느라 거칠게 늙어가는 여자, 허구헌날 부모가 싸우는 집에서 혼자 과자 먹으며 텔레비전 보는 예닐곱 살 어린애. 누구 하나 인생이 녹록치가 않다. 성별, 연령, 상황별로 각종 괴로움을 준비해 두고 ‘뭐 하나는 걸리겠지’ 비웃으며 우리를 지켜보는 게 삶일까. ‘세상은 차갑고 인간은 왜소한’ 이야기가 이토록 보편적인 건 그게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친절한 인생을 노려보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매력을 느낀다. 이주영 배우의 눈빛은 그래서 관객의 마음에 강하게 꽂힌다.

주수인만 주수인인 건 아니지만, 거대한 벽 앞에 홀로 선 생의 면모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야구소녀 주수인이다. 고교 야구 선수들에게 프로 입단이 높은 장벽이라면, 여자 선수에게는 거대하다 못해 자연 현상처럼 되어 버린 무엇이다. 고백건대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여자 야구선수의 프로 구단에 입단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니, 프로야구 경기가 남자들로만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를 인식한 적도 없다. 하늘이 파랗고 땅이 누런 것처럼, 프로 야구를 남자들끼리 하는 것을 당연하게만 느꼈으니 자연 현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넌 쟤가 야구선수로 보이냐?’는 스카우터의 말처럼, 여자들은 종종 다른 그 어떤 정체성에 앞서 여자로만 보여진다. 다른 선수들이 실력을 보일 것을 요구받을 때, 주수인은 일단 야구 선수로 보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핸디캡’ 따위의 가벼운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주 역사가 깊은 절망이다. 오래 대를 이어온 ‘강요된 포기’는 체념의 습관으로 뼛속 깊이 새겨져, 딸의 희망을 두려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야구영화이고 성장영화이며 인생과 세상에 대해 통찰하는 드라마이자 무엇보다 여성이 주인공인 서사이다. 이 영화가 ‘여자는 프로야구 왜 못 해?’라고만 말하는 단순한 영화는 아니지만, 그 말을 화두로 꺼냈기에 다른 말들도 더 힘있게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희망을 예로 들자면, 주수인이 놓지 않은 희망은 다음 세대인 후배 여자 선수에게 길을 열어주었을 뿐 아니라 앞 세대인 어머니의 ‘희망 트라우마’도 극복하게 한다. 주수인의 성장이 앞, 뒤 세대의 성장을 동시에 견인한 셈이다. 소년이 아닌 소녀의 것은 절망도 더 깊고 희망도 더 복잡하다. 다양한 층위에서 겹겹이 화려하게 피어나 보는 이에게 이토록 많은 것을 남긴다.


<- 손정우 석방 기사를 보니 이렇게 에두르는 문장으로 마무리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이 여자든 남자든 인생에서 주수인인 날들이 반드시 있을 테니, ‘더 많이 주수인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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