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 사귀냐?"는 놀림 앞에서
초등학교 3학년 큰딸 하율이는 일주일에 한 번 어린이 인문학 수업에 다닌다. 파주에 있는 ‘걷는 생각’이라는 곳인데, 하율이를 옆자리에 태우고 오가는 1시간이 무척 즐겁다. 낮에는 회사에 있고 집에선 동생들 돌보느라 늘 바쁜 엄마인데, (동요가 아닌!) 음악도 듣고 이야기도 나누며 하율이와 단 둘이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은 하율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엄마, 우리 반에 K라는 남자애가 있거든. 키가 조금 작고 얌전한 애야. 근데 급식 시간에 내 단짝 J가 깜빡 하고 교실에 점퍼를 두고 간 거야. 그걸 K가 가져다 줬어. 근데 어떤 남자애가 그걸 보고 “오올~~ 야, 니네 사귀냐?” 그러는 거야.
진짜? K 민망했겠다. J도 그렇고.
그러니까 말이야. 아니, 꼭 사귀는 사이어야 친절하게 대해주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K, 괜찮았어?
조금 울었어.
J는?
J는 괜찮았고.
그런 걸로 놀리면, 다음부터는 그렇게 친절하게 할 때 멈칫하게 될 텐데.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했어? 하율이는?
나는 그냥, 놀린 남자애를 차갑게 째려봤어. 친절하게 대해준다고 사귀냐고 하면, K는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렇지 그렇지. 다음에 그렇게 이상한 걸로 놀리면, “뭐야~ 좀 유치한 거 아냐?” 뭐 이런 식으로 말하면 어때? 다른 친구들이 그런 말을 안 하면 놀리는 애가 분위기를 주도하게 되잖아.
하하하. 그렇네.
“뭐야~ 뭐 그런걸로 놀리냐? 이상한 애 아냐?”
아이 엄마, 이상한 ‘애’는 아니고, 이상한 ‘행동’을 한 거지.
앗 그렇네. 그럼 그냥 “뭐야~ 뭐 그런 걸로 놀리냐? 유치하게?” 어때?
오, 좋아.
만약에 누가 하율이한테 그렇게 놀리면 하율이는 뭐라고 말할 거야? “너네 사귀냐?”
음.... “아니거든~ 그냥 친절하게 대하는 거거든~?”
오, 좋다.
최근에 넷플릭스 드라마 <D.P>를 봐서 그런가,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당사자가 아닌 목격자로서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분위기는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말하는 사람, 반박하는 사람, 쏘아보는 사람, 침묵하는 사람 모두가 ‘그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일조한다. 가만히 있었는데 분위기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데 나는 ‘가만히 있는 것’으로 기여한 것이다.
하율이는 큰 목소리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성향은 아니다. 친구에게 먼저 말을 거는 걸 무척 어려워 하는 내향인이다. 아마 그 상황에서 ‘차갑게 쏘아보는 것’이 하율이 딴에는 적극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잘 했다고 격려해 주고 싶었고,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다면 가볍게 툭,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한 마디를 얹을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기를 응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