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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Jul 21. 2016

강남은 못 가도 목동은 가야 할까 (3)

내 자식은 이 헬조선에서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는가. 목동으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 보면 결국 이 질문과 만난다. 그리고 이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와 같은 말이다. ‘내 자식이 어떤 사람이길 원하는가’는 ‘나는 어떤 사람이길 원하는가’와 다른 말이 아니다. 그래서 묻는다. 나와 내 자식은 어떤 식으로 돈을 벌어, 어떤 인생을 꾸려가면 좋을까. 이건 철저히 개인적인 가치관의 문제이므로 그저 나의 취향, 나의 철학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시길. 


1.

직종은 예술 분야였으면 좋겠다. 글을 쓰든, 음악을 만들든, 영화나 만화 그 밖의 어떤 장르라도, 무언가를 창작하는 사람이 되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게 내가 생각하는 멋있는 삶이다. 전업으로 예술을 하며 생활을 유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나는 경외감을 갖고 바라보며 부러워한다. 돈을 버는 방법으로도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무릇 최고의 수입은 저작권 수입이 아니겠는가.


2.

직업의 형태는 프리랜서였으면 한다. 노동 후진국인 이 나라에서 고용인이 되는 건 곧 노예의 삶이라는 걸 누구보다 우리 부부가 잘 알고 있다. 물론 프리랜서라고 쉽겠는가. 불안정한 내일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 역시 힘들겠지. 그러나 프리랜서는 적어도 ‘내 이름’을 가지고 개인으로서 일을 한다. 조직 안에서, 조직의 이름으로 일하고 있는 나와 남편은 그 부분이 참 부럽다. 프리랜서인 친구들이 차곡차곡 경력을 쌓으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가는 것을 보면 ‘언젠가 탄탄한 기반 위에 올라서겠구나’ 예상이 된다. 실제로 성실하게 뚜벅뚜벅 시간을 보낸 이들은 대부분 어느 지점에 도달하더라. 그러나 회사원일 뿐인 우리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배치된 부서에서 배치된 일을 하게 된다. 더구나 지금은 조직 안에 속해 있다 해도 결코 안정적이지 않은 시대이다. 언제든 짤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정년까지 다닌다 한들 쉰 언저리에 퇴직한 후 다시 내 일을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말 안 들으면 짜른다, 이상한 데 보내버릴거야!’라고 끊임없이 위협하는 한국의 흔한 경영진들 밑에서, 일개 조직원일 뿐인 우리는 인간의 존엄도 노동의 기쁨도 느끼기 힘들다. 능력있는 몇몇 사람들이 회사를 나가 살길을 찾아가는 것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는 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능력자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니 회사를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능력자인 것 같다고. 10여년 전 능력자였던 나는, 지금은 회사가 아니면 굶어죽는 철저한 무능력자가 되었다. 이렇게 조직은 개인을 길들인다. 나는 내 아이가 정글 속에서 단독자로 살아남는 능력자였으면 한다. 


3.

회사원이 되는 길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선택했으면, 가능하면 피했으면 하지만 어쩔수 없이 그래야 한다면, 두 가지 이상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기를 바란다. 이건 2010년에 소설가 김영하 씨가 <예술가가 되자, 지금 당장>이라는 제목으로 테드 강의를 했을 때 이야기한 내용이다.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미래는 우리 모두가 다중의 정체성을 갖는 것인데, 이 정체성 중 하나만이라도 예술가가 되는 거에요. 제가 뉴욕에 갔을 때 택시를 탔는데, 앞좌석에 연극 팜플렛이 붙어있었어요. 연극배우래요. 택시 기사이지만 연극을 하는 거예요. '리어왕'을 한대요. 바로 그런 세상이 제가 꿈꾸는 세상이에요. 어떤 사람이 낮에는 골프선수이면서 밤에는 작가, 택시기사이면 연극배우이고 은행원이면서 화가, 그러면서 은밀하게 혹은 공개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예술을 해 나가는 것이죠.” 

그렇게 하다가 전업 예술가가 된다면 더 좋겠지. 


4.

그렇다면 나는 왜 20대 때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할 생각을 못 했을까. 시험에 떨어졌을 때도 다른 시험을 준비했지 프리랜서가 될 생각은 안 했다. 한 번의 입사시험으로 모든 걸 끝내려는 마음, 빨리 이 불안함에서 벗어나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프리랜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회사원은 처음 한 번만 시험을 통과하면 매달 월급을 받을 수 있다. 그걸 ‘안정성’이라고 부르는거겠지. 안정성의 대가는 자유이고. 프리랜서든 조직원이든 실력을 갖추는 게 최고의 '안전책'이고, 조직 안에서 개인의 실력을 기르는 게 더 어려울 수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창작자가 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도 생각해 본다.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했고, 음악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을 업으로 삼으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물론 재능이 부족해서였겠지만, 그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어떤 장벽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친한 친구 중에 작사가가 있다. 여러 직업을 돌아돌아 프로 작사가가 되었는데, 처음 그 친구가 작사가로 데뷔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놀랐다. 어떻게 된 거냐 물으니 그녀가 이런 대답을 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너무 좋아했어. 그런데 은연중에 음악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래서 다른 일을 계속 전전했지. 지금은 알아. 누구나, 하고 싶으면 하면 돼.”

나와 그 친구가 과거에 했던 생각은 우리가 받았던 교육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육은 ‘무난한 사람’을 양성하는 게 목표 아니던가. 정신을 차려 보니 ‘저런 일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거고 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내면화되어 있었다. 


5.

끊임없는 자기 증명의 고단함을 해내려는 용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향해 직진하는 자신감, 이것을 갖춘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는 게 나의 결론이 되었다. 이건 결국 내가 아이를 향한 불안함을 어느 정도까지 참을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공부도 잘 하면서 창작자의 재능도 보여준다면 걱정이 없겠지. 하지만 내 아이가 반에서 20등, 30등 한다면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소설을 좋아하거나 음악에 미쳐있거나 영화에 푹 빠져 있는 내 아이가 성적이 안 좋아서 학교 선생님에게 무시당할 때, 나는 아이에게 “하율아, 창작자가 되면 좋겠어. 적어도 너의 여러 정체성 중 하나라도 예술가가 된다면 그걸로 너는 행복할거야”라고 말하며 격려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렇게 강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가. 나도 남편도 모범생으로 자랐다. 큰 일탈 없이, 말 잘듣는 아이로,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이 자리에 왔다. 내 아이들이 나와 다른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나와 다른 모습으로 자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럴 수 있을까. 

어쩌면 아이 학원비는 내 불안감을 잠재우는 비용일지 모른다. 목동 집값에는 엄마의 불안을 해소하는 비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렇게 비싼가보다. 


6.

이 글의 마무리는 하율이가 10살이나 11살 쯤 됐을 때 지어야 할 것 같다. 닥치지 않은 일에 대해 무엇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조만간 열심히 목동 부동산에 전화를 돌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다만 내 불안감을 다스리는 비용이 그리 비싸지 않기를, 점점 단단한 내면을 갖게 되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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