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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Aug 09. 2016

육아휴직의 원인과 결과 (1)

2014년 가을, MBC의 사옥이 여의도에서 상암으로 이전하면서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가 기획되었다. 일주일 간 <쇼 음악중심>, <나는 가수다>를 비롯한 몇몇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라디오의 특집 공개방송이 MBC 앞 광장에서 제작되었는데, 나는 이 공개방송의 조연출로 '차출' 되었다. 인력에 여유가 있는게 아니다보니 보통 라디오의 행사는 연출, 조연출, 작가진 모두 각자 맡고 있는 데일리 프로그램을 하면서(내 경우 당시 <써니의 FM데이트>라는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었다) 동시에 공개방송을 준비하게 된다. 체력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쉽지 않다. 하지만 공개방송의 매력이 그거다. 힘들면서 재미있는 것. 몇천 명의 관객이 환호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마주할 때의 희열! 팔뚝에 오소소 돋는 소름을 어루만지며 ‘이래서 가수들이 공연을 하나' 짐작하게 된다. 나 역시 그래서 조연출을 자원했지만 이번에는 '힘들면서'에 조금 더 무게가 실렸다. TV 프로그램과 무대를 공유해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는데, 카메라 워킹을 생각해 동선을 짜는 TV와 달리 라디오는 콘서트에 조금 더 가까운 공개방송을 추구하다보니 협의할 게 많았다. 컨셉을 잡고, 출연진을 섭외하고, 구성을 하고, 무대와 음향 등 각종 하드웨어적인 요소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마치 허들 경기, 혹은 몬스터 잡는 롤플레잉 게임 같았다. 하나 처리하면 다음 관문, 또 다음 관문, 행사가 끝나는 날까지 '문제 발생-회의-해결'의 과정이 반복되었다. 심지어 공개방송 전날 메인작가가 무대에서 떨어져 다치는 사고까지 있었다. 한 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 날 찍은 사진이 이것밖에 없네요. 가장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였죠. 전인권 선생님의 노래가 시작되자, 쉴새없이 시끄럽던 스탭들의 인터컴이 조용해졌습니다.   


그 날도 회의가 있었다. 각자 맡은 프로그램이 끝나고 모두 모인 건 자정이 가까운 시각, 골치아픈 어떤 문제를 앞에 두고 제작진 모두 아이디어를 짜냈다. ‘잘 되는’ 팀의 회의에서는 말하는 사람의 직위보다 그의 아이디어가 중요하게 평가받게 마련이다. 우리 팀은 꽤 괜찮은 팀이었고, 막내작가나 조연출들의 발언에서 실마리를 얻어 문제를 해결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날도 그런 식으로 아이디어에 아이디어가 얹어져 가까스로 회의가 끝났다. 그리고 근처 술집에서의 시원한 맥주 한잔. 오늘의 몬스터를 무사히 처리했다는 안도감을 만끽하며 소박한 축배를 나누는 자리였는데.... 나는 이상하게 울적했다. 왜 이럴까. 회의는 잘 끝났고, 장애물은 처리했고, 우리는 좋은 팀인데, 나는 지금 왜 즐겁지 않을까. 

한참 내 마음을 들여다본 끝에 이유를 찾아냈다. 그 회의에서 내 몫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 오늘 내가 별로 쓸모가 없었다는 생각이 나를 우울하게 하고 있었다. 공개방송이 제대로 굴러가는 와중에도, 거기에 내 기여가 없으면 별로 기쁘지 않은 나를 발견했다. 그 팀에서 분명 내 역할이 없지 않았다. 아니, 나는 꽤 많은 일을 했다. 한 번의 회의에서 내 생각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하여 의기소침해할, 그럴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내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신경쓰였다.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내가 일을 사랑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나는 워커홀릭이야”라는 말을 별 부끄러움 없이 해왔고, 누구보다 일을 즐거워했다. 공개방송을 준비하는 그 기간 동안 아침 일찍 출근해 밤 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몇 달 반복하다 보니 하율이 얼굴을 볼 시간이 없었는데, 남편은 그런 내가 안쓰러워 인터넷에 카페를 만들어 하율이의 사진을 올려주었다. 회원이 나와 남편, 둘 뿐인 카페였다. 딸의 얼굴을 집에서가 아니라 인터넷으로 보는 엄마, 그럼에도 내가 사랑하는 이 일에 집중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나를 위로했는데,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돌진하던 내 마음에 제동이 걸려버린 것이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건 정말 내가 이 일을 사랑해서일까 아니면 나를 증명해 보이려는 마음 때문일까. 그 대상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들이 초라한 내 자존감을, 무언가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발을 동동 굴러 온 내 조바심을, 맨살처럼 드러냈다. 


사실 이런 조바심은 꽤 오래 된 것이었다. 하율이를 낳았을 때부터, 어쩌면 MBC에 입사했을 때부터, 어쩌면 그 이전 학창시절부터, 혹은 나의 타고난 성향일지도 몰랐다. 100여 가구 남짓한 시골에서 태어나 자그마한 학교에 다닌 덕에 학창시절 내내 성적은 상위권이었지만, 상급 학교로 진학할 때마다 나는 내 등수가 곤두박질치는 상상을 하며 긴장했다. 힘겹게 입사에 성공했지만 왠일인지 ‘준비가 덜 된 채 PD가 되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들키기 전에 빨리 실력을 쌓아야 하는데....’하는 마음을 품고 살았다. 그러다 임신을 했고 불안함은 극에 달했다. 출산과 육아 때문에 일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성취를 얻지 못할거라는 두려움이, 하율이를 가졌다는 걸 안 순간부터 생겼다. 

나는 하율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 곧바로 일본어 학원에 등록했었다. 몸도 추스르기 전에 시어머님께 간난쟁이 아이를 맡기고 JLPT 시험을 준비한 것이다. 업무와 관련이 있는 공부는 아니었지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일을 하고 있는데 혼자 집에서 아기를 보고 있는 그 ‘정체된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다. 아직 3-4시간 간격으로 모유수유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시험은 약 4시간, 중간에 쉬는 시간은 20분, 시험장 밖에서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쉬는 시간에 잽싸게 뛰어나와 차 안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다시 교실로 돌아가 2교시 시험을 치렀다. 그렇게 독하게,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몰아부치며, 내 삶은 언젠가부터 그런 식이었다. 

시험 전날 남편이 내게 편지를 써주었는데, 이런 문장이 있었다. “합격할 거에요. 응원할게요. 나와 하율이는 당신의 허들이 아닌 발판이에요” 남편은 내게서 무엇을 봤기에 이런 글을 썼을까. 내 못난 욕심과 초조함이 남편과 아이를 장애물로 생각한다고 느끼게 한 걸까.


스스로를 압박하며 살아온 시간의 끝에서 나는 길을 잃고 말았다. 너무 오랫동안 내가 얼마나 쓸모있는 인간인지 증명하는 데 골몰해 살아온 것 같았다. 이제 내게서 PD라는 직업을 빼면 뭐가 남는지, 직업인이 아닌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율이를 낳고 쉰 기간이 총 넉 달 반, 사용할 수 있는 육아휴직이 10개월도 더 남아 있었다. 왜 그렇게 급하게 복귀했을까. 휴직을 한다고 해고하는 회사도 아닌데, "아이가 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정작 남은 휴직을 쓰지 않는 건 뭔지. 쉬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일을 잠깐 놓기로 했다. 내 정체성 중 가장 큰 부분, 칼 융 식으로 표현하면 내가 가장 무겁게 붙잡아 왔던 페르소나를 벗어보기로 했다. 

아이 때문이 아니라 실은 나 때문에 육아휴직을 결정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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