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수연 Aug 10. 2016

육아휴직의 원인과 결과 (2)

하율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10시부터 4시까지, 휴직 기간 동안 내게는 하루에 약 6시간의 자유가 있었다. 처음 몇 달은 뒹굴뒹굴, 무위도식하며 보냈다. 낮잠도 자고, 야한 웹소설도 봤다(내 오랜 길티플레져이다). 좀 지나자 무언가 하고 싶어졌다. 별렀던 장편소설을 읽었다. 컴퓨터에 다운받은 영화가 아닌,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러 다녔다. 혼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긴 글을 썼다. 트위터에 올리는 140자 단상이 아닌, 내 생각을 정리한 한두 페이지의 일기를 몇 년 만에 다시 쓰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일도 많이 했다. 20대 초반에 즐기던 인라인 스케이트가 문득 타보고 싶어져서 장비를 사고 강습을 받았다. 홍대 미술학원에서 강사 일을 하는 스물 일곱 살 선생님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같이 그림도 그렸다. 사람 없는 평일 오전 카페에서 둘이 색연필이나 붓으로 슥슥 종이를 채워가는 일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충만함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쓸데없는 일을 할 때 진짜 즐겁구나. 나는 그동안 너무 쓸데 있는 일만 했었구나.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아이와 함께 보내는 ‘무위의 시간’도 훨씬 편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어린이집이 있는데, 하율이와 함께 가려니 30분도 넘게 걸렸다. 고양이가 지나가면 따라가 보기도 하고, 중간에 주저앉아 간식을 까먹기도 했다. 비오는 날엔 더 오래 걸렸다. 물웅덩이마다 폴짝대며 장화의 성능을 자랑하는 하율이를 말리지 않았다. 상암동에도 달팽이가 나온다는 걸 알게 됐고, 달팽이가 움직이는 속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이와 같은 속도로 살았다.


그러면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에 대해 내가 한참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아이는 내가 무엇을 한다고 더 빨리 자라는 것도 아니고, 덜 해준다고 천천히 자라는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율이는 자연스럽게 내가 알려주지 않은 말을 했고, 점점 복잡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고, 개미와 비둘기를 관찰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아이 옆에서 같이 사는 것, 그게 내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것만이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나는 하율이에게 많은 것을 못 해준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했었다. 소풍 도시락을 직접 싸주지 못한 것도, 잠들 때 동화책을 읽어 주지 못한 것도, 같이 목욕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내가 해주지 못한 건 여러 개가 아니었다. 아이와 함께 사는 것, 그걸 못했을 뿐이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 살지 않고 아이의 삶을 감독만 했다. 내 아이에게 엄마는 늘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빨리 밥 먹고 어린이집 가야지, 빨리 양치하고 자야지, 빨리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야지. 아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아이의 속도로 아이 옆에서 함께 하는 것, 뼛속깊이 효율적인 인간인 나는 그것을 참 못했다. 


이제 곧 복직을 한다. 나는 쓸데없는 일은 커녕 해야하는 일을 하기도 바쁜 일상을 살 것이고, 아이에게 다시 ‘빨리 하라’는 재촉을 하지 않을 자신도 없다. 하지만 인생의 어느 한 부분, 내 아이와 속도를 맞춰 살아본 이 경험은 분명 날 조금 달라지게 했다고 믿는다. 생각할수록 육아휴직은, 내가 태어나서 한 일 중 아이를 낳은 것 다음으로 잘한 일이다. 


나는 운 좋게도 육아휴직이 고용불안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회사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덕분에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게 가능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육아휴직을 하고 이런 즐거움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는 사회이길 바란다. 하루에 14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는 딱한 내 남편도, 나와 같은 회사에서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동료들도. 우리 나라의 보육정책은 엄마아빠가 직접 아이를 기르는 걸 돕는 대신, 부모가 대리 양육자를 통해 아이를 기르는 것을 돕는다. 시간이 아니라 돈을 주는 정책이다. 하지만 30-40만 원 지원금을 준다고 해서 결코 더 많은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진 않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그런 부모들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어야, 아이가 우리에게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준다는 사실이 믿어져야, 이 헬조선에서 아이를 낳을 엄두라도 내 보지 않겠는가. 


('엄마아빠가 직접 아이를 기르는 걸 돕는 대신, 부모가 대리 양육자를 통해 아이를 기르는 것을 돕는 보육 정책'이라는 표현은 정재호 선생님의 책 <잘 자고 잘 먹는 아이의 시간표>에서 빌려왔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육아휴직의 원인과 결과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