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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Aug 11. 2016

흉터 있는 아이

아기를 낳고 얼마간은 예방접종이 가장 중요한 외출 스케줄이 된다. 특히 결핵 예방접종은 만 4주 이내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피내용(주사형)과 경피용(도장형) 두 종류가 있는데, 피내용은 접종 후 한 달쯤 지나 곪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약간의 흉터를 남기고 아문다. 경피용 BCG는 접종 후 한 달이 지나면 작은 침 자국이 18개 생겼다가, 3-5년 후 거의 사라진다. 요즘은 흉이 적게 생기는 경피용 접종을 많이 하는데 일본에서 수입하는 접종약으로 비용이 7-8만원 정도이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와 대한소아과학회는 피내접종을 권장한다. BCG 백신의 양을 정확하고 일정하게 주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 하정훈 <삐뽀삐뽀 119 소아과> & 대한소아과학회 홈페이지 )

보통 소아과에서는 경피용만 취급하기 때문에 피내용을 맞히려면 보건소로 가야 하고, 그나마도 한 번 주사약을 개봉하면 일정 수의 아이들에게 주사해야 하므로 사전에 접종 가능한 날짜도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엄마들이 경피접종을 선택한다. 만약 하율이가 피내접종을 하면, 하율이는 또래 중에 어깨에 주사 자국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람이 될 것이었다. 하율이의 BCG 접종을 앞두고 나는 어떤 종류를 맞혀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용산구 보건소에서 피내접종으로 BCG 예방주사를 맞혔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흉이 덜 지는 경피용’ vs ‘효과와 안정성의 피내용’의 선택이다. 나는 이것을 ‘흉터 없이 매끈한 삶’과 ‘내용(=효과나 기능)에 집중하는 삶’ 중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의 선택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비약일 수 있다. 경피접종도 효과나 기능이 담보돼 있기에 허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방접종이라는 건강/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에 대해서 대다수의 엄마들이 WHO나 대한소아과학회 같은 공인 기관이 권장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이 내게는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대한소아과학회가 권장하는 방식을 대부분의 소아과 병원에서 취급하지 않는 건 더 이상하고. 


하율이 팔뚝에 남겨진 선명한 흉터를 보며, 나중에 하율이가 커서 ‘왜 내 팔에만 주사 자국이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이 책을 읽어줘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라는 소설인데, 주인공이 젊은 시절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다. 


23세 16일 / 1946년 10월 26일 토요일

방금 전 사랑을 끝내고 엎드려 있을 때였다. 땀범벅에 녹초가 된 채 느긋한 맘으로 졸기 시작하는데, 등과 엉덩이와 목과 어깨 위로 시원한 물방울이 한 방울씩 불규칙적으로 떨어졌다.... (중략)... 쉬잔이 한 손에 물컵을 들고, 지뢰를 찾을 때처럼 집중한 채 손가락 끝으로 물을 뿌리고 있었다. 주근깨와 점들이 흩뿌려져 있는 그녀의 살갗은 별들이 빛나는 하늘이다. 난 볼펜으로 별자리를 그려놓았다.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이번엔 네 차례야. 네 하늘도 좀 보자. 쉬잔이 말했다. 하지만 내 몸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중략)... 난 아쉬운데, 쉬잔은 자기 방식대로 해석한다. 넌 완전 신제품이구나. 

- <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좋은 섹스는 두 사람이 나눌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유희이고, 더 좋은 섹스는 서로의 영혼을 위로하며 상처를 치유한다. 사랑하는 남자(물론 남편이다. 여보 사랑해)와 함께 보내던 밤, 아직 긴장감이 남아있던 옛날옛적, 서로의 몸에 대한 호기심을 마음껏 발산하고 충족하던 시간(아, 야한 얘기 쓰려니 쓸데없이 문장이 길어지고 내용은 허해진다), 아무튼,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서로의 몸을 바라보고 만지며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릴 적엔 어떤 아이였는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눔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가던 그 시간을 떠올려 보자는 거다. 팔뚝의 화상에 대해 물으니 어릴 적 집에 혼자 있다가 난로에 데인 거란다. 엄마가 바빠서 혼자 있곤 했던, 병원에 곧장 데려갈 사람도 없었던 그의 어린 시절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다리에 넘어진 자국이 많은 나는 덤벙대는 내 성격도 사랑해 주는 그의 눈빛에 위로받았다. 이상한 모양의 점에 킥킥대기도 하고, 내가 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마귀의 존재를 알게 되기도 한다. 우리 몸에 남아있는 흉터는 우리가 살아온 역사였고, 그 흔적들은 우리의 사랑을 더 풍성하게, 더 즐겁게 해 주었다. 


흉터 없이 깨끗한 몸보다, 내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몸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자국을 지운 매끈한 몸을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쓰는 시대, 그걸 아름다움이라 여기고 그런 여자를 예쁘다고 말하는 시대, 내 딸은 본인 몸의 흉터를 긍정하는 여자로 자라기를 바란다. 몸만 나누는 연애보다는(물론 가끔은 그런 연애도 재미있겠지만) 상처를 공유하는 사랑을 경험했으면 한다. 소설 <몸의 일기>의 인물들처럼, 서로의 몸에 난 점으로 별자리를 만들며 킥킥대는 밤은, 성인이 나눌 수 있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장난이지 않은가. 


이런 이야기를 어느 선배에게 했더니 그가 말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흉터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나?” 아, 그런가. 아무튼 그 때 나는 4주 된 아기 예방접종을 앞두고 이런 복잡한 생각을 했던, 의욕 과다 초보 엄마였다. 둘째 하린이는 경피용으로 맞혔다. 지금 사는 집에서 마포구 보건소는 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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