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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Oct 13. 2016

몸살이 나도 아이가 예쁜걸...

나는 체력이 약한 편이다.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근육양이 지나치게 적다거나 저체중이라는 말을 듣는다. 회사에 있을 때는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 밤샘작업이나 사람들을 만나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일도 곧잘 한다. 아마 내가 의욕있게 어떤 일을 할 때 뇌 속에서 '불끈불끈 호르몬'같은게 나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공적인 시간'이 끝나면 나는 시체가 된다. 아이를 낳기 전, 집에서 나는 거의 누워 지냈다. '나'라는 인간은 어떤 정신적인 '파워'로 체력을 끌어올려 하루하루를 굴려가는 시스템인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며칠 전 몸살에 걸려 많이 아팠다. 쉴 수 없어서 벌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깨어있는 동안은 일을 하거나 아이들을 돌봐야 하고, 잘 때도 10개월 된 둘째가 칭얼거리면 일어나 아이를 도닥여 다시 재워야 한다. 체력은 소진됐는데 나는 계속 움직여야 한다. 이런 일상에 '끝'이 없다는 게 더 마음을 지치게 한다. 이를테면 '이번 일 끝나면 쉬여야지', '주말에 밀린 잠 보충해야지'같은 자기 위안이 불가능한 것이다. 산다는 게, 아이를 기른다는 게, 계속하기에 힘에 부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들겨 맞는 듯이 몸이 아프고 손가락 움직일 힘도 없는 와중에, 둘째가 안아달라고 손 쭉 뻗으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안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10kg짜리 아이를 안아올려 얼굴을 부비면서 생각했다. 아, 징글징글하다. 이 와중에 아이가 예뻐 죽겠는 나의 '에미 본능'이, 징글징글하다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됐다.
첫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산후우울증이 찾아왔었다. 처음 우울감을 느꼈던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꼬물거리는 신생아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 아이가 너무 '사람'인 거다. 아, 진짜 사람이네. 어떡하지. 그 순간 뇌리를 스친 단어는 '불가역성'이었다. 불가역적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적합할 수 있을까. 그동안 내가 했던 그 어떤 선택도, 심지어 결혼도, 돌이킬 수 있었다. 무를 수 있었다. 대가는 따를지언정 취소가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건 그렇지가 않았다. 이 아이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둘 중 하나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기 전까지는 결코 끝낼 수 없는 관계구나, 하는 생각이 무섭게 마음을 내리쳤다. 그제서야 내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엄청난 건지 감이 왔다. 지나치게 '사람'인 아이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아, 그랬다, 공포였다. 부담감과 답답함을 상회하는 감정이었다.
산후우울증이 시작된 시점은 정확히 기억나는데, 어떻게 극복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어느 틈엔가 안개 걷히듯 사라져버렸다. 아마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돌이키고 싶지 않은 일'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졌겠지.
섹스라고 하는 인간이 행하는 유희의 끝판왕,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쾌락의 정점에서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어떤 존재'가 생겨난다는 아이러니. 이건, 생각할수록 신의 악동적인 면모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를 기르면서 누리는 기쁨이나 성장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신비는 신이 왜 신인가를 깨닫는 경이로움이고. 이래저래 나는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보다 아이를 기르면서 신심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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