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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Dec 28. 2016

우리, 함께 이 시간을 겪어내 보자...

엄마가 돌아가신 지 두 달이 되어 간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 전화해서 목소리를 듣고 싶다. 취재 가고 있다고, 하린이가 아프다고, 하율이 먹이라고 담가주신 물김치가 쉬어버렸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 맑고 낮은 안정감 있는 목소리로, 취재 잘 하고 오라고, 하린이 약 챙겨 먹이라고, 쉬어버린 김치는 버리라고, 새 걸로 담가 주겠다고, 그런 자잘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파도처럼 덮쳐오는 그리움에, 차마 맞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삼켜지면서 살고 있다. 백전백패. 속수무책. 늘 맥을 못 추고 당한다. 


그 와중에 하율이 어린이집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율이가 일과 중에 갑자기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울음을 터뜨려서 선생님이 달래 주셨다고 한다. 하율이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엄마는 열 번 울었고, 이모는 열다섯 번 울었고, 아빠는 여덟 번 울었어요” 하더란다. 제 딴에는 어른들이 모두 우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나 보다. 지지난 주엔가, 친정집에 가는 차 안에서 하율이가 “우리, 외할머니 집 가는 거야~”라고 말하다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더니, “.....이모 집 가는 거야...”라고 정정하더라. ‘외할머니 집’에서 ‘이모 집’으로 단어를 고르면서 하율이는 무얼 느낀 걸까. 본능적으로 내 표정을 살피던 그 어린 것의 마음은 대체 무엇인지. 토끼 같고 사슴 같은 그 눈, 겁먹은 초식 동물 같던 그 눈빛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을 무겁게 한다. 


지난 주, 서천석 선생님과의 술자리에서 그 얘기를 꺼냈다.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니, 누군가에게 엄마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나 하율이의 당황스러운 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아마도 술기운이었나 보다. 내 질문은 이거였다. 하율이가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말할 때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건 엄마가 보고 싶을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누구나 겪게 되는 이 보편적인 슬픔, 보편적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잔인하고 아픈 이 불행을, 우리는 어떻게 당해야 하는가. 이 감정을 어떻게 겪어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누구든 살면서 예외 없이 겪게 될 일인데,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나는 왜 배운 적이 없는가. 이게 누구에게 물을 수 있는 물음인지 모르겠지만, 내 기준으로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 어른처럼 보이는 서천석 선생님 앞에서 하소연인 듯 술주정인 듯, 그냥 한번 물어보았다. 


선생님이 해 주신 이야기 두 가지가 술이 깨고 나서도 계속 머릿속에 남는다. 


하나는, 아이가 보이는 감정적인 반응을 어른의 기준에서 생각하지 말라는 것. 외할머니가 정말 보고 싶어서 운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어른들이 자기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 준다거나, ‘에고, 어린 것이 얼마나 할머니가 생각날꼬...’하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봐 준다거나 하는 반응을 누리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율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런지 어떤지 내가 제대로 살핀 적이 없다는 뜻이다. 엄마가 너무 그립고 슬픈 나의 이 감정이 너무도 강렬해서, 당연히 아이도 그러리라고 생각했지 하율이가 보이는 반응의 정체가 뭔지 관찰할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나의 어렸을 적을 생각해 보면, ‘어른들의 반응이 좋아서 짐짓 그런 척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게 영악하다거나 순수하지 못 하다거나 하는 가치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냥 그게 아이의 속성인 것 같다. 


두 번째는, 우리는 일상적으로 겪는 감정들을 너무 가볍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한국 사회는 일반적으로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감정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성숙한 사회일수록 개인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들을 하찮게 보지 않는다고 그러셨다. 


얼마 전 아홉 살 딸아이를 둔 어떤 남자 선배가 6개월 간 육아휴직을 하고 돌아왔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본인은 딸이랑 꽤 잘 놀아주는 아빠라고 생각했는데 육아휴직을 하고 딸과 매일 함께 지내다보니, 그동안 자신의 생활은 ‘주말부부’같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딸과 잘 놀아준다고 해 봤자 주말에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거였지, 매일의 일상을 공유하는 덴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선배의 말과 서천석 선생님의 말이 합쳐져, 내 안에서 이런 이론이 완성되었다. 매일의 사소한 일상, 거기서 느끼는 크고 작은 감정들이 중요하다고. 아침에 눈 뜰 때 좀 더 누워있을까 말까 망설이는 것, 바쁜데 꼼지락거린다고 잔소리하는 것, 맛있는 반찬이 없다고 투정하는 것, 저녁에 돈까스 만들어 주겠다고 달래는 것, 그러면서 오락가락하는 감정, 감정, 그 사소한 감정들. 친구와의 갈등, 숙제하기 싫은 마음, 어린이집에서 저녁 먹기 전에 엄마가 데리러 왔으면 하는 속상함, 그 일상적이고 소소한 내 아이의 느낌들. 그것이야말로 중요한 게 아닐지. 


내가 서 선생님의 책 중 가장 좋아하는 책 제목은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이다. ‘키운다’, ‘가르친다’는 일방의 어휘가 아니라, 삶의 여러 사건들을 함께 겪어내면서 성장하는 동반자 내지 가족으로서의 부모자식 관계에 대해 하나의 잠언처럼, 아주 잘 표현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엄마, 하율이의 외할머니의 죽음을, 나와 하율이는 함께 경험하고 있다. 물론 온도 차는 있겠지만, ‘부재’라는 게 얼마나 일상적으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집요하게 닥쳐오는 것인지 계속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외할머니 집'을 '이모 집'이라고 바꿔 말해야 하는 순간처럼, 그건 너무도 느닷없이, 사소하게, 사소한 것에 비해 긴 잔상을 이끌고 찾아온다.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 

하율이와 함께 살아가는 나. 

인생에 닥쳐오는 이런저런 사건들을 함께 겪어내는 관계. 가족. 친구. 동반자.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울 때 꼭 안아주면서 “엄마도 그래”라고 말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아니, 그렇게 할 수 있어서, 너의 그 마음이 내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 위로가 되는, 나와 내 딸.... 

아이가 내 삶에 온 지 5년 만에, 나는 인생에서 그런 존재를 갖게 됐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말할 때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봐 주는 게 달콤하기도 하고, 그래서 눈물을 쏟는 하율이의 복잡한 속내를 짐작하며, 나는 내 아이의 다섯 살 한 토막을 들여다보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소소하지만 중요한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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