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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Jan 18. 2017

나는 이럴 때 씁니다.

(육아에세이 아닙니다)

얼마 전 브런치 구독자가 1000명을 넘었습니다. 제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너무 신기합니다. (1000명이나 볼 만한 글인지 면구스럽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실 그리 자주 글을 업데이트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이참에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나는 어떨 때 글을 쓰는지.  


1.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숙직 날 나는 씁니다. 불편한 잠자리, 유쾌하지 않은 샤워실, 혹시 있을지 모를 사고에 대한 긴장감, 낮부터 연거푸 마셔댄 커피 때문에 말짱한 듯 몽롱한 정신, 남편 혼자 애 둘 잘 보고 있나 불안한 마음….  숙직이 싫은 이유는 끝도 없이 많지만 그 와중에 굳이 좋은 점을 꼽자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워킹맘에게 거의 불가능한 바로 그것을 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밤 프로 스탭들만 드문드문 앉아 있는 썰렁한 사무실에서, 나는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즐겁게 끼적입니다.  (이런 시답잖은 글이 올라온 걸로 눈치채셨겠지만, 네, 저는 지금 숙직중입니다.) 


2.

영화 <아가씨>에서 하녀 ‘숙희’가 분연히 떨쳐 일어나며 내뱉는 대사가 있습니다. “아가씨는 수줍게 떨며 앉았고, 신사 분은 짓궂게 다가가고, 눈치 빠른 하녀는 두 상전을 위해 자리를 비켜줬고. 잘들 하고 있어, 숙희야. 모두가 빌어먹게도 제 역할을 잘 하고 있어. 니미럴.” 오후 3시 쯤, 수런거리는 사무실을 휘 둘러볼 때 문득 그 대사가 생각납니다. 책상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부감쇼트로 내려다보이면서, 숙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다들 제 역할을, 빌어먹게도 잘 하고 있어. 

그럴 때 글이 쓰고 싶어집니다. 이 사무실, 이 회사, 내 인생, 이 세상이 통째로 거대한 역할놀이를 하는 듯이 느껴질 때. 아가씨와 백작과 본인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것에 심사가 뒤틀려 깽판을 놓는 ‘숙희’처럼, 딱 그런 마음입니다. 내게 맡겨진 역할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싶어 질 때, 착착 들어맞는 톱니바퀴 같은 내 일상이 징그럽게 느껴질 때, 뭐라도 쓰게 됩니다.  


3.

예전에 제 브런치에 ‘글 쓰는 일’을 ‘똥 싸는 것’에 비유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 비유를 가져오고 싶습니다. 무언가 쓰고 싶은데 막상 쓰려면 막막할 때, 저는 글이 나올 때까지 꾸역꾸역 집어넣습니다. 변비로 고생하던 시절 제가 깨달은 진리입니다. 먹다 보면 싸게 돼 있습니다. 채소를 많이 먹으면, 더 빨리 나옵니다.

글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영화도 보고, TV도 보고,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그렇게 꾸준히 집어넣다 보면 결국엔 글로 쓰고 싶은 내 이야기가 생깁니다. 경험상, 책이 효과가 좋습니다. 내 뇌가 먹는 여러 양식들 중 책이 채소인가 봅니다. 읽고, 보고, 들어서 무언가 꽉 찬 느낌일 때, 쏟아내지 않고는 못 견딜 마음일 때, 글을 씁니다. 이 공간에 올리는 글은 주로 그런 글입니다. 꼴깍꼴깍 차올라 ‘이건 내가 어떤 식으로든 말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쓴 것들입니다.

얼마 전 <영어책 한 권 외워 봤니?>라는 명저를 출간하신 MBC 김민식PD님은, 매일 블로그에 글을 한 편씩 쓰십니다. 민식 선배를 만났을 때 말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시냐고, 정말 대단하시다고, 저는 ‘뭔가 쓰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 차오를 때 겨우 하나씩 글이 나온다고 했더니, 민식 선배가 그러시더군요. “수연 씨 글에는 그런 마음이 느껴져” 

왠지 모르게 그 말이 좋았습니다. 

‘아... 글 마렵다...’하고 중얼거리며, 나는 씁니다. 

이야기하고 싶어 죽겠는 내 마음이 글에서 느껴진다면, 와우, 저는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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