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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Jan 18. 2017

나는 기억한다.

조 브레이너드의 책 <나는 기억한다>를 흉내내 보았습니다.

나는 기억한다. 처음 하율이의 초음파 사진을 받아들고 하율이의 태명을 '2cm'라고 지으며 남편과 낄낄거리던, 산부인과 복도의 공기를. 그 때 우리는 아이가 자랄 때마다 태명을 '몇 센티'로 바꾸자고 했었다. 


나는 기억한다. 태명을 '9cm'로 바꾸던 날 내가 했던 생각을. 태아가 몇 센티까지 자라고 태어나는지도 모른 채 섣불리 태명을 지었던 내 성급한 결정이 한심했었다. 


나는 기억한다. 뱃속의 니가 꿀렁거리던 태동의 느낌을. 그 때 나는 심은하가 나왔던 옛날 드라마 <M>을 떠올렸다. 


나는 기억한다. 진통이 와서 택시 잡아타고 혼자 병원에 가던 날, 통증 때문에 행선지도 겨우 말하는 만삭의 나에게 "산부인과는 왜 가세요?"하고 묻던 택시 기사의 면상을. 진통만 아니었어도 한 대 쳤을 것이다. 


나는 기억한다. 내가 감기에 걸려서 감기약을 지어 왔을 때, 친정 엄마는 "얼른 먹어라"하시고, 시어머니는 "애기 젖 주고 먹어라"하셨던 걸. 그런 건 정말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2012년 3월8일 하루 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기억한다. 2015년 12월26일 새벽부터 밤 까지 벌어진 일도 물론 선명히 기억한다. 하율아, 하린아, 너희가 엄마아빠에게 오던 날의 풍경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단다.  


나는 기억한다. 갓 태어난 하린이를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던 하율이의 빛나는 눈빛을. 


나는 기억한다. 하율이를 낳고 다시 출근하던 첫 날 내가 입었던 옷을. 사람들에게 내가 '아이 낳기 전과 똑같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쓰던 나의 조잡스러운 마음을. 


나는 기억한다. 늦은 밤 술자리에서 내게 "어떻게 아기 엄마가 이 시간에 술을 마셔요?"라고 말하던 그 남자의 말투를.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내 가족밖에 없다. 그 날 내가 불쾌감을 표시하여 술자리의 흥을 깨트린 것에 대해, 기어코 당신에게 사과를 받은 것에 대해, 나는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처음으로 '셋째를 낳고 싶다'고 생각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는 깨달았다. 나와 같은 슬픔을 겪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 사실만이 깊은 슬픔에 위로가 된다는 걸. 그건 남편도 자식도 아니고, 형제자매였다. 내가 하율이와 하린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런 존재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주는 것 뿐임을, 나는 알게 됐다. 


나는 내가 "우리 셋째 가질까?"했을 때 소스라치던 남편의 얼굴도 기억한다. 


나는 기억한다. 내가 남편에게 작년 결혼기념일 선물로 '나는 기억한다'라는 책의 형식으로 우리의 역사에 대해 글을 써 달라고 했던 것을. 당신이 '알았다'고 대답했던 것도 분명히 기억한다. 당신도 기억할 것이다.  빨리 내 놔라. 내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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