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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Jan 19. 2017

형제자매의 역학관계

- '9와 숫자들'의 노래 <언니>를 듣고

‘9와 숫자들’의 노래에는 낯선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익숙하지 않은 어휘로, 내가 느끼는 감정의 면면을 정확히 표현해 낸다. 보컬 송재경이 서늘한 직선의 목소리로 한 단어 한 단어씩 깨끗하게 듣는 이에게 가사를 가지고 올 때, 비로소 ‘내가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구나’하고 깨닫는 일도 빈번하다. ‘거기에 무언가가 있다’ 정도로만 알고 있던 감정을 끄집어내어 정체를 밝혀내는 가사라고나 할까. 내 마음을 국정조사 해 주는, 음악계의 김경진 의원같으니.     


‘9와 숫자들’의 2016년 앨범 <수렴과 발산>을 들으면서도, 그렇게 마음이 헤집어지는 경험을 했다.   

   

언니, 언니는 언니의 노래를 불러

나는 나만의 노래를 부를게

그래도 언니는 사랑하는 내 언니야     


사람들이 언니만 예뻐하고

언니만한 동생 없다고 할 때엔

눈물을 훔치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그 말은 사실이니까     


언니, 이런 말은 미안해

언닐 좋아하지만

언제까지나 언니의 그늘에 갇혀있을 수는 없어


언니, 그런 말 좀 하지 마

내 할 일은 내가 해

지금부터 우리는 각자의 길을 찾아 가는 거야     


사랑하는 내 언니야..     


 - ‘9와 숫자들’ <언니> 가사 중 발췌     


처음에는 남자 보컬이 난데없이 자꾸 ‘언니’거리는 게 신기해서 호기심으로 가사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렇게 집중해서 듣다 보니 이런저런 상념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와 감당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노래를 들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내 여동생이었다. 공부 잘 하는(그렇다, 나는 왕년에 시골 초등학교의 수재였다. 우리 반 22명 중 언제나 1등, 그게 나였다. 중고등학교 땐, 묻지 마시라. 훗.) 언니 때문에 늘 비교당해야 했던 내 동생. <언니>의 가사는 내 동생이 내게 하는 말인 것 같았다. 특히 이 부분. ‘걱정 마 엄마 곁은 내가 지킬 테니 언닌 신경 쓰지 마. 언닌 아직 날 몰라 내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사람을 만나며 어떤 미래를 그토록 간절히 그려왔는지. 괜찮아 상관없어 난. 내일이면 언니는 떠날 거고 이제 나도 다 컸으니’ 실제로 지금 고향에서 병석에 누워 계신 아빠를 지키는 건 내 동생이고, 난 한 달에 한 번, 겨우 들러서 용돈 몇 푼 쥐어주고 오는 ‘내일이면 떠날’ 언니이다. 몇 해 전, 동생이랑 둘이서 열흘 정도 파리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스무 살 때 집을 떠나온 이후로, 동생과 그렇게 길게 붙어 있었던 적이, 생각해 보니 처음이었다. 그 때 동생과 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알게 된 건, ‘나와 떨어져 있던 10여 년 동안 동생이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거였다. 10년 전에 헤어진 동생을 만난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어찌 보면 나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동생이 뒤틀림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짐작했다.     


두 번째로 떠오른 건 나였다. 내게도 이 노래처럼 ‘제발 우리 각자의 길을 가자. 너는 너고 나는 나야’라고 말하고 싶게 만드는 친구가 있었다. 좁은 인간관계 바닥에서 우리가 관리하던 ‘썸남 어장’은 자꾸만 겹쳤고, 나는 번번이 졌다. ‘너보다 내가 낫다’는 자신감이 있었으면 그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을 텐데, 불행하게도 그녀는 가난이라는 내 콤플렉스를 지독히도 의식하게 하는 ‘부유해서 해맑은’ 캐릭터였다. 아, 지금도 짜증이 나려고 해서 더 이상 이 얘기는 못 쓰겠다.      


내 경험에 반추해보고 나서야, ‘언니, 언닐 좋아하지만 언제까지나 언니의 그늘에 갇혀있을 수는 없어. 지금부터 우리는 각자의 길을 찾아 가는 거야’라는 가사는 사실 화자가 언니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임을 알게 됐다.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악을 쓰고 자신에게 외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9와 숫자들’의 <언니>는 내게 정체성과 열등감에 관한 노래로 들린다. 내 동생의 이야기이자 내 이야기이고,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자라면서 필히 극복해야 하는 어떤 존재, 지겹도록 나를 따라다니며 내가 의식하게 만드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아버지일 수도, 형제자매일 수도, 늘 나보다 한 발 앞서 있는 친구일 수도 있다.      


하율이와 하린이를 키우면서 '언니니까 어때야 한다'거나, '동생은 이래야 한다'는 식의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 여동생이 힘들게 사춘기를 보낸 이유 중 하나가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가 했던 ‘언니는 어떤데...’하는 말 때문임을 알기 때문이다. 동생이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에 반해 내가 얼마나 동생에게 무신경했었는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동생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갈 길 갔던 내 모습이, 악의 없던 무심함이, 무지가 상처를 주는 메커니즘이 늘 그렇듯 악의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동생을 괴롭게 했었을 것임을 나중에야 뼈아프게 알았다.      


하지만 나와 남편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하율이와 하린이가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자라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요즘 깨닫고 있다. 하린이를 돌보는 베이비시터 이모님은 식사 시간에 하린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유, 하율이언니 밥 잘 먹는 것 좀 봐~ 하린이는 언니 못 이기겠네. 언니가 1등이네!" 하율이 밥 잘 먹으라고, 기분 살려 주려고 하는 소리다. 이제 갓 돌이 지난 하린이가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 안심하고. 시어머님은 하율이와 하린이 있는 데서 내게 종종 말씀하신다. "하린이 성격 대단한 것 좀 봐. 언니한테 장난감 안 뺏기려고 저렇게 힘을 쓰네. 조금 더 크면 하율이가 하린이 못 당하겠어~" 둘이 성향이 다른 것이 신기해 내게 하시는 말씀이다. 별 생각 없이, 무의식중에. 식당이나 카페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하린이를 보며 우리에게 말한다. "아유, 아기가 정말 예쁘네요" 하율이를 보면서는 하지 않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에 내 동생이 하율이를 씻기면서 "우리 하율이는 엉덩이도 예쁘네~"했더니 하율이가 이런 말을 했다. "이모, 사실 저는 예쁘다기보단 귀여워요."     


나와 남편이 아무리 조심해도 하율이와 하린이를 비교하는 말을 전혀 안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우리의 주변 사람들이 ‘언니니까’, ‘동생이니까’ 하고 말하는 것을 일일이 막는 건 불가능하다. 하린이는 말을 배우기 전부터 "언니는 이렇게 잘 하네"라는 말을 듣는다. 하율이는 동생이 태어난 순간부터 "하율이는 이랬는데 하린이는 저렇네"하는 말을 듣고 있다. 둘은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형제자매는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가. 언니는 책임감 강한 성격으로, 동생은 눈치 빠른 사회성으로 발현되는가? 맏이는 부모의 관심과 자원을 독식하여 많은 것을 누리고 막내는 빈곤한 지원 속에서 생존력이 강해지는가? 첫째는 이기적이고 막내는 애교가 많은가? 형은 안정지향적이고 동생은 모험을 사랑하는가? 형제자매의 성향에 관한 많은 속설과 분석들이 있지만, 이는 '혈액형 성격 분석'처럼 어느 것을 끌어와도 말이 되거나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편견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부터 노력하고 싶다.     


'9와 숫자들'의 노래 <언니>를 들으며, 혹시 한 사람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끊임없이 무언가와 싸우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형제자매는 ‘인간의 초기 투쟁 대상’에서 빼놓을 수 상대일 터. 그리하여 ‘언니를 사랑하지만 언니의 그늘에 갇힐 수는 없어. 우리 각자의 길을 가자. 언니는 언니고, 나는 나야. 그래도 언니를 사랑해’라는 이 노래의 가사에서 나는 소년소녀가 어른이 되어가는 지독한 성장통을 느낀다.  

    

하율이와 하린이는 필연적으로 서로를 의식하며, 경쟁하며, 극복하려 애쓰며 자라게 될 것이다. 엄마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를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말해주는 거겠지. 너는 너만의 매력이 있는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생각날 때마다 이야기해야 겠다. 내가 무의식중에라도 뱉을지 모를, 그래서 부지중에 상처 줄지 모를, 둘을 비교하는 말, 그걸 덮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그게 ‘비교하는 말 듣지 않게 해야지’ 라는 다짐보다 훨씬 현실성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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