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개월 아들을 둔 회사 동기가 얼마 전 육아책을 추천해 달라며 카톡을 보내왔다. 회사 일은 버겁고, 아이는 점점 주장이 세지고, 할 일은 많은데 체력은 달리고, 이래저래 마음이 고단한 모양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몇 년 앞서 아이를 낳아본 사람(=나)에게 연락 한 번 해본 것일 테지. 일단,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 있을 만큼 육아책을 많이 보지 않기 때문에 나는 농반 진반, 좀 싱거운 대답을 했다. ‘이제부터는 정답이 없는 것 같다. 육아책은 엄마의 마음을 다스리는 용도일 때가 많다. 그런 역할을 해 주는 육아책이 좋은 육아책인 것 같다. 커피 사줄테니 수다나 떨자’ 뭐 이런 이야기들. 뒤늦게, 너무 성의 없는 말이었나 싶어 좀 미안해졌다. 그래서 말 나온 김에 나도 생각해 보았다. 육아에 관해 내게 인사이트를 주었던 책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하면 아이를 더 잘 키울 수 있을까’가 궁금해 책을 찾을 때, 사실 ‘육아’ 코너가 아닌 다른 섹션의 책들에서 도움을 받은 적이 많은 것 같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이와 나, 두 인간이 관계를 맺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어찌 육아 서적에만 있겠는가. 아이를 키우면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질문들 -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성숙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효과적인 대화와 설득의 기술은 무엇인가, 이 아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이 행복한가, 우리가 살고 있는/살아갈 세상은 어떤 곳인가 등등- 에 대한 해답은 인문, 사회, 문학 섹션의 책들에서 오래 전부터 다뤄 온 주제이지 않나. 그런 의미로, 육아 코너 밖에서 찾은 육아서적들, 아이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 대해 좋은 조언을 해 주었던 책들의 목록을 떠올려 보았다.
1.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부모-자식은, 여러모로 불균형한 관계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것을 보아 온 사람과 처음부터 모든 것을 들켜 온 사람, 이 둘이 상대를 한 인격으로 인정하고 동등한 눈높이로 소통한다는 게 애초에 가능하겠는가. 경험, 지식, 사랑의 크기까지, 모든 면에서 나는 내 자식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도저히 없다, 내 좁은 그릇으로는. '내가 너를 잘 안다'고 말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부모란 사람들은. 얼마나 오만하기 쉬운 입장인가 말이다. 내가 내 자식을 잘 안다는 착각, 그 정수리에 가차없는 일격을 가하는 책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이다.
1994년, 13명의 사망자를 낸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의 두 범인 중 한 명인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저자이다. 그녀는 말한다.
"이 극악무도한 참극의 배후에 있는 불편한 진실은, ‘좋은 가정’에서 걱정 없이 자란 수줍음 많고 호감 가는 젊은이가 그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톰과 나는 텔레비전 시청과 설탕이 많이 든 시리얼 섭취를 제한하는 적극적인 부모였다. 아이들이 볼 영화를 골라주고 책을 읽어주고 기도를 하고 안아주면서 아이들을 재웠다. 파국이 있기 전해에 일으킨 문제를 제외하고는 딜런은 말 그대로 전형적인 착한 아이였다. 키우기도 쉬웠고 함께 있으면 즐거웠고 언제나 대견한 아들이었다. 딜런을 괴물로 그려 콜럼바인의 비극이 보통 사람이나 가족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인상을 준다면,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안도감은 거짓일 것이다." (116p)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을 한두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다. 다만, 몇 가지 다짐은 하게 되는데, 겸손해야 겠다, 내 자식을 위해 남의 자식도 행복하게 해야 겠다, 육아에 실패한 것 처럼 보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내가 단죄할 입장은 아님을 잊지 말자, 그들도 나처럼 최선을 다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결심들이었다.
2. <윤미네 집>
두 아이를 돌보는 일상이 버거울 때, 이를테면 퇴근하고 무거운 몸으로 애들 장난감을 정리하면서 신경질이 날 때나(내 싱크대도 엉망인데, 니 주방놀이 싱크대까지 치워야겠니?), 한 팔로 아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 얼굴의 다크서클을 지우는 '화장 묘기'를 부리며 출근 준비를 할 때, 도대체 이것들은 언제 커서 사람 구실 할까 한숨이 나올 때, 이 책을 떠올린다. 전몽각 선생이 딸 '윤미'가 태어나던 날부터 시집갈 때 까지의 하루하루를 카메라에 담은 사진집인데, 꼬물거리는 신생아의 신비로움 뿐 아니라, 지쳐 보이는 '윤미 엄마(=전몽각 선생의 부인)'의 맨얼굴까지, 아버지가 포토그래퍼였기에 가능한 '근거리 사진'들이 가득하다. 한장 한장 보다 보면, 사람의 인생이 이런 것인가, 아이가 이렇게 빨리 자라는가, 회한이 들면서 뭉클해지고, 전쟁같은 나의 오늘이 조금은 소중하게 느껴진다. 정말이지, 마음 다스리는 용도로는 이 책만한 게 없다. 사진집이라 빨리 볼 수 있는 건 덤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윤미'씨가 결혼하는 장면이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윤미'씨가 아버지 '전몽각' 선생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걷는 컷을 보며, 우리 남편은 말했다. "이제 '윤미'씨가 이 사진을 찍기 시작한 아버지의 입장이 되겠네" 사진집 첫 장에서는 내 딸들을 생각하면서 보기 시작했는데, 덮을 때는 엄마아빠를 떠올리게 되었다.
3. <책은 도끼다>, <인문학으로 콩 갈다>
행복하고 가치 있는 인생은 무엇인가, 에 대해 광고인 박웅현이 쓴 책 <책은 도끼다>를 읽으면서, 궁금해졌다. 이 아빠는 딸을 어떻게 키웠을까. 그래서 읽게 된 책이 박웅현 씨의 딸 박연의 책 <인문학으로 콩 갈다>이다. 토요일 밤에 다 같이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고 다음 날 늦잠을 자는 집안 문화, 가족 여행을 하는 방식이나 집안일을 분담하는 부부의 모습 등등이 그대로 이 아이에게 교육이었음을 깨닫는다. 나에게는 좋은 하나의 예시가 되어 주었다.
4. <잠실동 사람들>
공부를 잘 하는 게, 이왕이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좋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할 수만 있으면 다들 아는 이름의 어느어느 대학엘 보내는 게 좋다는 생각, 이걸 부정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지, 그러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느냐를 두고 의견 차이가 있을 뿐. 이왕이면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은데 그러기 위한 노력은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 건지, 나도 궁금하다. '적절한 수위'에 대한 판단은 각자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밤 늦게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보며 '이건 아닌데'하고, 누군가는 '이 정도는 해야지' 한다. 어떤 태도가 맞는지, 나는 어느 정도를 받아들일 수 있고, 어느 정도가 되면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할지, 그 '적정선'을 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와 내 자식에게 서로 상처가 되지 않을,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인생의 가치에 대한 숙고가 포함된 선택을 하려면, 지금 나와 내 무리의 모습에서 한발 물러나 조금 차분하게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가 필요한데, <잠실동 사람들>은 그걸 한번 해 볼 수 있게 하는 책인 것 같다. 나를 포함한 한국의 학부모들의 모습, 내가 달려가려고 하는 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이야기, 그걸 아주 재미있게 적어 놓아서 눈 한번 못 떼고 읽었다.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깨닫는다. 영어유치원을 보낼지 말지, 학원을 보낼지 말지, '학세권'으로 이사를 갈지 말지, 그 선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선택지들 앞에서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 아직 본격적인 '러시'에 뛰어들지 않은 나는, 여전히 겁이 난다. 내가 이성을 잃지 않고, 내 얇은 귀를 잘 단도리 하면서, 나와 내 아이들의 무엇(인간성? 개성? 마음?)을 잘 지켜낼 수 있을까.
5. <82년생 김지영>, <남자의 탄생>
남자라면 <82년생 김지영>을, 여자라면 <남자의 탄생>을 한 번쯤 읽어보는 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82년생 김지영>은 아내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줄 것이다. 내 딸이 앞으로 어떤 현실 속에서 자라게 될 것인지에 대한 힌트와 더불어. 마찬가지로, <남자의 탄생>은 남편에 대한 이해를 조금은 높여주는 책이다. 더불어, 남편을 포함해 내가 사회에서 만나는 많은 남자들이 왜 어떤 면에서 놀랍도록 유사한지에 대해서까지도 어느정도 알려준다. 나는 아들이 없지만 아들이 있다면,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키우면 안 되는지) 힌트를 얻을 것 같기도 하다.
(그 외에도 많은데.... 종종 책 추천 글 올려 볼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