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두 딸을 데리고 제주도에 휴가 갔다가 말로만 듣던 '노키즈 존' 식당을 만났다. 휴대폰으로 맛집을 검색해서 찾아간 식당이었는데, 문 앞에 <13세 이하 어린이는 입장이 불가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 부부는 매우 당황했다. 주변엔 마음에 드는 다른 식당이 없었고, 17개월 둘째는 슬슬 배가 고파서 짜증을 낼 조짐을 보였다. 식당 주인에게 혹시 포장이 되는지를 물었고, 다행히 가능하다기에 그럼 밖에서 기다리겠노라 말했다. 3인분의 식사를 주문하고 포장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 둘을 데리고 식당 밖에서 서성이고 있자니 조금 서러워졌다. 4월, 제주도의 저녁은 아직 쌀쌀했다. 바람이라도 좀 피하고 싶었지만 '13세 이하 어린이는 입장이 불가합니다'라는 안내가 너무 치사해서 차마 입이 안 떨어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나와 남편은 뒤늦게 후회했다. 그냥 나올껄 뭘 또 그걸 포장해 달라고 했을까. 너희들에게는 안 판다는데, 자존심도 없이....
남편과 몇 날 며칠을 두고 노키즈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만큼 우리에겐 충격적이고 분한 일이었다. 아이는 들어올 수 없다니, '유태인과 개는 출입 금지'라는 팻말과 뭐가 다른가?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지저분하다고? 아니, 세상 떠나가라 큰 소리로 얘기하는 매너 없는 중년들은 어떻고? 예의 없는 부모들의 숫자가 예의 없는 '다른 어떤 부류'의 숫자보다 압도적으로 많다고 할 수 장담할 수 있나? <ㅇㅇㅇ 출입 금지>라는 말에 장애인, 흑인, 여성, 이런 단어를 넣는다고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지 않나? 그런데 왜 '아이'라는 말을 넣는 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글들을 뒤져 보니 노키즈존이 확산되게 된 배경에 대한 '무개념 부모들'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식당에서 아이가 소변이 마렵다고 하자 컵에다 소변을 보게 했다거나, 식사하는 테이블에서 기저귀를 갈았다거나, 심지어 그 기저귀를 치우지 않고 그냥 갔다거나. 압권은 이거였다. 식당에서 아이가 뛰다가 다쳤는데 식당과 종업원이 4000만원 정도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이 나서 결국 식당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 식당 주인이 음식을 파는 건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라는 게 노키즈 존 찬성론자들의 논리였다.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게 벌써 3주 전의 일이다. 그동안 이 '노키즈 존'에 대한 글을 쓰려고 여러 번 시도했는데 쉽지 않았다. 감정적으로는 화르륵 끓어오르는데 도무지 주제를 잡을 수가 없었다. 대체 뭐라고 써야 한단 말인가. 나는 사람들이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해 좀 더 관용어린 시선을 가지기를, 그래서 노키즈존이 점점 줄어가기를 바라지만, 이건 내가 부모의 입장이기 때문에 가지는 마음일 뿐이다. 아이들이 없는 조용하고 쾌적한 공간을 원하는 식당 주인과 손님의 기호에 뭐라 할 수는 없다. 딱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는 마음, 요즘 유행하는 단어 '선의'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딱 지금 내 상황이다.
내가 이렇게 세상과 사람들의 선의만을 바라야 하는 무기력한 입장이었던 적이 얼마나 있던가. 아니, 그 전에 '입장 불가'의 사유에 해당되어 본 적이 있던가. 누군가를 제외한다는 공지 앞에서 더 의기양양하게 제지선을 통과하는 게 익숙한 삶은 아니었나. 노키즈존이라는 단호한 안내를 받고 나는 왜 "그럼 포장해 갈게요"라고 말했었는지를 곰곰히 되짚어 보았다. 나는 괜찮다, 상처받지 않았다, 이런 방어기제가 무의식적으로 표현된 건 아니었을까.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 확실히 약자의 입장을 경험하는 일이다. 노키즈존 식당 앞에서 나는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거절감. 정말 오랜만에 그 단어를 떠올렸다. 남편은 아주 옛날, 한창 취업 하느라 전전긍긍하던 시절에 느껴본 감정이라고 했고, 내 경우 몇 년 전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돌리던 때가 생각났다. 대졸 학력에 서울시민, 정규직, 이성애자, 비장애인, 젊은이인 내가, (여기에 남성이기까지 한 내 남편은 더더욱), 아이가 아니었다면 과연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는' 듯한 감정을 느낄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1미터 미만의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길거리 흡연자의 담배꽁초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알게 된다. 유모차를 밀고 다니다 보면 횡단보도 앞, 차로와 인도를 연결하는 경사로에 자동차를 정차하는 게 얼마나 잔인한 건지 알게 된다. (그건 휠체어 사용자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모차가 갈 수 있으면 휠체어도 갈 수 있다. 이것 역시 내가 유모차족이 되어보고 나서야 깨닫게 된 사실이다.)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님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제주도에 사는 사람에게 가장 먼 도시는 어디일까. 서울? 강원도? 정답은 대전이다. 공항이 없는 도시라서 그렇다고 한다. 서울에 사는 사람에게야 대전이 '범수도권'에 해당하는 가까운 곳이지, 제주도민에게는 서울보다 훨씬 멀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희진은 '인식론으로서의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누구나 한 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한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중에서
'차별과 타자성'을 휴가 온 제주도에서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이를 키움으로 나는 그동안 가지지 못한 또 하나의 '인식 틀'을 갖게 된 거라고, 애써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아이를 동반한 손님을 맞이하는 건 식당 주인에게 여러모로 귀찮은 일일 것이다. 우리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이런 배려와 수고를 감당하려는 식당 주인이 늘었으면 좋겠다. 배려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되어보니 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 사회에 그런 분위기가 흐를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내가 관용을 구하는 대상이 특정한 어떤 사람이라면 문제가 쉬울 텐데, 나와 내 가족은 사회 전체, 불특정 다수로부터 배려를 받아야 하지 않는가.
지구는 둥글고 세상 만사는 연결돼 있다는, 그래서 내가 관용적인 사람이 되면 '노키즈 존'도 줄어들 거라는 터무니없는 나비효과 이론이 잠정적인 내 결론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1-2년 전 쯤, 우리 아파트에 서명 운동이 일어난 적이 있다. 근처에 어린이 재활병원이 들어서는데 그걸 반대하자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나는 서명 받으러 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냈고, 나 같은 주민이 많았는지 지금 그 자리에는 무사히 어린이 재활병원이 들어서 있다. 내가 이른바 '혐오시설'이라 불리는 것들을 배척하면, 우리 사회는 점차 배타적인 분위기가 될 것이고 '노키즈 존'도 늘 것이다. 내가 배려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질수록, 약자를 대하는 내 태도가 성숙해질수록,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갈수록 노키즈존도 줄어들 거라는 막연한 믿음, 이게 지금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