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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Jun 09. 2017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잔인한 달은 4월이 아니라 3월이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 본 부모들은 안다. 조막만한 손으로 내 팔을 부여잡는 그 어린 것을 어린이집 선생님이 억지로 떼어내 데려갈 때, 우리 모녀에게 세상이 왜 이러나 싶은 게 그렇게 잔인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내 팔뚝을 꼭 쥐고 있다가 아이가 기어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옷 소매가 뜯어지는 느낌, 아니 내 피부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 오열하는 아이에게 웃으며 ‘빠이빠이’를 하고 회사로 돌아서며 몇 번이나 눈물을 쏟았다. 하율이를 처음 어린이집에 보냈던 3년 전 3월은 그랬다.

시간이 흘러 둘째 하린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시기가 오자, 나는 2월부터 긴장했다. 더구나 하린이는 12월 생이어서 또래 친구들보다 훨씬 발달이 더뎠다. 이제 겨우 걸음마 시작한 아이를,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를, 저기 혼자 두고 일을 하겠다고 나는 이러고 있구나. 두 번째인데도 그 울음소리에는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이론적으로는 잘 안다. 웃으면서 과감하게 돌아서야 한다는 것, '이별의식'은 짧을수록 좋다는 것, 엄마가 눈 앞에 안 보이면 의외로 아이는 잘 지내게 된다는 것,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곧 울지 않고 헤어지는 날이 온다는 것.... 아무리 알고 있어도 가슴이 아픈 건 아픈 것이다. 아이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는데, 이성이 틈입할 여지가 있겠는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걸 포기할 수도, 내 직장생활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회사 관두고 어린이집에서 아이 데려올까, 좀 더 키워서 말이라도 알아 들을 때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 선택지를 마음에서 지워버리려고 애를 썼다. 애초에 그 카드는 없는 거라고, 나는 회사에 가야 하고 아이는 죽으나사나 어린이집에 적응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개별적 자아'라는 단어를 발음해 보았다. 하율이는 하율이의 삶이 있다. 하린이는 하린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 있다. 내가 떠나고 선생님과 또래 친구들 틈에 홀로 남을 아이를 상상하면 너무 어색하고 불안하고 안쓰러웠지만,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나와 함께 있던 시절에도 내가 이 아이의 무언가를 대신 해 줄 수는 없지 않았던가. 젖 빠는 것, 잠드는 것, 응가 싸는 것, 아이는 모든 게 처음이었고 힘들었고, 그래서 자주 울었지만, 그 때부터, 어쩌면 뱃속에서 태동을 할 때부터, 아이는 자기 몫의 인생을 감당해 왔다.


결국 나는 이 아이와의 이별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라고도 생각해보았다. 지금은 아이가 내 등을 보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아이의 등을 보는 날들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곧 책가방 메고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배웅하게 될 것이고, 스물 언저리에는 혼자 살겠다고 짐 싸서 떠나는 아이를 보내야 할 것이고, 언젠가는 제 남자와 손잡고 버진로드 걷는 모습을 뒤에서 봐야할지도 모른다. 그 많은 헤어짐의 서막일 뿐이라고, 그렇게도 생각해보았다.


아이를 달래는 건 선생님께 맡겨야 하는 일이었고, 나는 나를 달래야 했다. 개별적 자아고 나발이고, 이별의 서막이고 뭐고 간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내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느낌에 참 괴로웠다. 혹시 엄마와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적어서 아침에 더 안 떨어지려고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밤 프로를 했던 시기에는 종종 12시가 다 되어 퇴근하곤 했는데, 아이는 그 때까지도 자지 않고 나를 기다렸다. 엄마 얼굴을 채 한 시간도 못 보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또 어린이집 가느라 헤어져야 하니, 내가 생각해도 아이에게 잔인한 일 같았다. 이 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할 거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지만, 선생님이 알림장에 올려주시는 아이의 웃는 사진을 보며 가까스로 믿음을 유지했다.

엄마가 가면 곧 울음을 그친다는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쯤 창문 틈으로 몰래 지켜보다 간 적도 있다.

육아를 하면서 부딪치는 많은 문제들이 그렇듯, ‘3월의 고통’도 시간밖에 답이 없는 듯 하다. 당하는 수밖에, 겪어내는 수밖에, 아이는 울고 나는 괴로워 하면서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어 보였다. 시간이 지나야 해결되는 일을 만날 때는 어떤 자세가 좋은 걸까 자문해 본다.


회사에서 일이 좀 많았던 시기가 있었다. 출근해서 화장실도 제 때 못 갈 정도로 일을 했는데,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할 일을 다 못 끝내는 하루가 반복됐었다. 숨쉴 틈 없이 헉헉대며 종일 뛰어다녀도 일을 쌓아둔 채 퇴근하는 마음은, 허탈함이었다. 정신없을 내일을 예상하며 회사를 나설 때, 몸이 힘든 것 못지않게 그 허탈함이 괴로웠다.

아마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이따금씩 그런 시기를 만나지 않을까. 내 경우 몇 번 그런 전쟁을 치르다 보니 나름대로 '마인트 콘트롤 스킬'을 습득하게 됐는데... 어떤 일들은, 그 '일'이 끝나야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이 지나야 끝난다는 것... 그러니까, '이 일을 다 끝내고 퇴근하리라'는 임전무퇴의 각오보다는 '오늘이 끝났으면 퇴근하자'는 마음가짐이 버티기에 낫다는 것이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일'을 만났을 땐, 오늘의 몫 만큼만 견디는 게 방법이 아닌가 한다.


3월에 처음 하린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지금은 6월이다. 요즘도 가끔 아침에 웃으며 선생님께 안기는 하린이를 보면 '이거, 실화냐?' 싶다. 거짓말처럼 시간은 흘렀고 아이는 자랐고 어린이집에 익숙해졌다. 이렇게 또 한번, 안도한다. '다른 카드는 없다'는 마음으로, 배수의 진을 치고 육아에 임해야 하는 부모에겐 한 계절을 나는 게, 이처럼 기승전결 두렷한 드라마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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