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마일리지가 쌓인 덕분에, 오랜만에 어머니께서 미국 LA 우리 집에 오셨다. 이번에는 손녀의 봄방학까지 함께 계실 수 있도록 3개월 동안 머무르시게 되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하고 레노베이션까지 마친 뒤라 꼭 직접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와주신다니 무엇보다 기쁜 마음이 컸다. 한편으로는 회사 일이 많다 보니, 어머니께서 주중(때로는 주말에도) 혼자 심심하게 계시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주변에서는 미국에 부모님께서 오시면 친구도 없고 할 일도 딱히 없어 지루하고 답답해 하신다고, 그래서 금방 귀국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아침이면 아이 학교 라이드가는 시간이 맞춰 준비하시고, 그때부터 점심까지 LA fitness에서 다양한 운동 프로그램을 여유롭게 즐기며 운동하셨다. 나중에는 30분 거리 집까지 혼자 걸어오시기도 하고, 컬버 다운타운에 있는 멋진 공원에서 캘리포니아 햇살을 맘껏 즐기시기도 했다. 늦은 오후에는 집안일을 도와주시거나, 독서, 휴대폰 보기, 드라마보기 등으로 시간을 잘 보내셨다. LA fitness에서 만난 다른 어르신들과 함께 여유로운 엘에이 나들이를 다녀오시기도 하셨다. 영어도 잘 못하시는 상황에서도 이렇게 독립적으로 잘 지내주신 덕분에,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이렇게 엘에이 생활에 자연스럽게 적응하시며, 오히려 더 건강해지고 단단해지셨다.
이번 방문동안 꼭 해보고 싶었던 게 하나 있었다. '어머니'와 '아들'간의 뻔한 대화를 넘어, '나를 가장 사람해주는 사람'의 인생 스토리를 듣고 싶었다. 한 세대 먼저 살아오신 인생 선배로서 편하게 해주시는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우리는 짜투리 시간을 활용했다. 집 앞을 산책하며, 뒷동산을 오르며, 브런치를 먹으며 어머니의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취업 후 회사 메인 데스크에서 일하셨던 이야기, 사내 미스 OO에 뽑혀 새로운 분야의 커리어를 시작하고 교육을 받으며 신나셨던 이야기, 그 와중에 아버지를 만나 연애했던 이야기, 우리가 초등학생이 되고 나서 다시 일을 시작하셨던 이야기, 나중에 그만두시게 된 이야기까지... 어머니는 아픈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어떤 순간을 사랑하셨는지까지도 이야기해주셨다. 무엇보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셨다. 나는 정말 재미있게 빠져서 들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어머니를 더 이해하고 감사하게, 존경하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 어려운 환경, 더 적은 기회 속에서도 근사하고 아름답게 인생을 살아낸 인생 선배셨다. 어떤 책이나 드라마, 영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정말 재미있고 뜻깊은 이야기 시간이었다.
왜 진작 이런 대화를 하지 않았을까. 그런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지 못했을까. 어머니는 단순히 나의 보호자가 아닌데. '나의 이런 장점이 어머니에게서 왔구나', '나의 이런 행운이 어머니의 이런 아픔에서 왔구나' 하는 깨달음이 차곡차곡 쌓였다. 또한, 어머니의 놀랍고 존경스러운 점들이 결국 '자식에 대한 사랑'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질문하게 되었다. '나는 내 아이를 그렇게 사랑하는가? 정말 그만큼, 그런 마음으로 대해왔는가?' 나도 한 아이의 아빠로서 이 질문을 자연스레 가슴에 품게 되었다.
오늘 밤, 어머니께서 한국으로 돌아가신다. 우리는 작은 약속을 하나 했다. 어머니께서는 살아오신 에피소드를 생각나실 때마다 하나씩 적어 사진으로 보내주시기로 하고, 나는 답례로 내가 좋아하는 화가 이야기, 클래식 음악가 이야기, 작가 이야기 등을 써서 보내드리기로 했다. 이렇게 시작된 뜻 깊은 3개월이 3년, 30년으로 이어지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