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핑크보다 베토벤을 더 좋아합니다

by James Hur
ciVWsOpf2yA6WgivCujhGEih8MZKpZ3y2dw8k6X1sLykNH7WiKYyFJ_vO2DEWYbXtvN3t3DTMWK8VHQrfGOu4U2mwUlAXde5EUaakWH5vxmY0APuJyvrhZXsDzfW9_c5wQBE52Va 저 굳게 다문 입과 부리부리한 눈빛을 보라.

내 취향이 변했다

지난 금요일, 대학 선배님들과 오랜만에 저녁 식사 자리가 있었다. 나보다 15년, 20년은 위인 분들이 대부분인 모임이다. 여기에 참여한 지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우리는 이민자로서 인생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정치, 예술, 사회, 첨단기술 등의 심각한 주제로 발표 및 토론을 하기도 한다. 관심사가 워낙 다양하다보니 다소 엉뚱하고 특이한 주제로 몇시간을 토론하기도 한다. 한번은 'BTS와 추사 김정희. 누가 더 위대한 예술가인가?'에 대해 밤 11시까지 토론하기도 했다. (참고로 나만 BTS 편... 모임에 젊은 피가 절실하다!)


금요일의 주제는 미술로 시작해 클래식 음악으로 넘어갔다. 미술품 컬렉터인 한 선배의 강연 에피소드를 다같이 듣다가 내 클래식 음악 덕질로 주제가 살짝 넘어갔다. 베토벤과 반 고흐의 평행한 삶, 브람스의 플라토닉 러브 이야기까지... 예전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예전의 나는 클래식의 '클'자도 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음악의 어머니 헨델이 여자인 줄 알았을 정도... (사실은 음악의 아버지 바흐보다 더 터프한 남자였다). 이렇게 한마디를 거들게 되다니... 인생 참 모를 일이다.


산책과 클래식

아마도 산책 때문일 것이다. 내가 클래식 음악에 빠지게 된 건.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어느 날, 머리를 식힐 겸 집 근처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마치 아플 때 챙겨먹는 약이 있는 것처럼, 특히 마음이 싱숭생숭할 땐 조용하고 평화로운 산책시간이 도움이 되었다. 소프라노같은 새소리, 따사로운 캘리포니아 햇살, 송글송글 맺혀진 이마의 땀. 마음이 정화되고 평온해졌다. 그리고 이 산책을 더 깊게 즐기고 싶다는 생각에 음악을 찾기 시작했다. 아마도 Helene Grimaud(헬렌 그리모)의 essentials 앨범 바흐 곡을 자주 들었던 것 같다.

올 해 LA Hollywood Bowl에서 공연하는 Helene Grimaud. 티켓 구매 완료! 넘 기대된다.


클래식 음악과 산책의 궁합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하나씩, 하나씩 다른 작곡가, 다른 피아니스트의 앨범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플레이리스트는 클래식으로 가득 채워졌고, 매일같이 산책하며 듣는 습관이 생겼다. 거의 매일같이 들었던 것 같다. 아이폰 앱 클래시컬(classical)이 큰 도움이 되었다.


베토벤 소나타 8번 2악장

클래식을 들으며 생긴 가장 큰 변화는 '궁금증'이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2악장을 예로 들어볼까? 이 곡은 단단하고 따뜻한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든다. 묵직하면서도 단단한 삶을 살아온 인생 선배가 말없이 내 앞에 앉아서 내 등을 쓸어주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이런 곡을 쓸 수 있었을까?"


maxresdefault.jpg 청각장애를 갖고 태어난 트지이 노부유키. 그는 반 클라이번 콩쿨에서 우승한 천재다.

이 곡을 쓸 당시 베토벤의 사정을 알고 나면 이해가 되는 듯 하다. 그는 음악의 수도 비엔나에서 점점 명성을 쌓아가던 중이었고, 이제야 인생 좀 풀리나 싶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게 왠 날벼락.... 그는 청력 이상을 겪기 시작했다. '비창'이란 이 곡의 제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절망이나 비관을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정적이고 단단한 내면과 위로를 표현했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몇 년 전이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큰 감명을 받았고, 수시로 이 음악을 들으며 그의 마음을 떠올려보곤 했다. 클래식 음악 '덕질'도 이 시기에 시작된 것 같다.


바흐에서 볼컴, 손열음에서 올라프손까지

베토벤으로 시작한 관심은 자연스레 넓어졌다. 바흐의 대위법과 푸가, 윌리엄 볼컴의 모던 래그타임, 한국의 자랑스러운 피아니스트 손열음, 임윤찬, 조성진, 그리고 유럽 무대를 누비는 비킹구르 올라프손, 앨리스 사라 오트, 헬렌 그리모까지. 하나씩 취향이 생겼고, 하나씩 좋아하는 연주자가 생겼다.


내 취향은 대체로 이렇다. 굴렌 굴드나 랑랑처럼 자유분방하고 해석이 과감한 연주보다는 마우리치오 폴리니, 다니엘 바렌보엠, 비킹구르 올라프손처럼 섬세하고 깊은 연주에 더 끌린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도 좋아한다. 루벤 게라드스나 저스틴 테일러 같은 연주자도 응원한다. 물론 마르크 안드레 아믈랭, 예브게니 키신, 마르타 아르게리치 같은 괴물 넘사벽 육각형 피아니스트도 좋아한다.


나의 일상에 던지는 메시지

점점 더 깊어지는 덕질에는 음악가들의 영감과 자극의 영향이 크다. 정해진 악보와 악기 안에서 자유롭게 실험하고 도전하는 동시에 음악의 가치를 위대하게 여기는 그들에게서 사랑, 열정, 헌신을 느낀다. 혹독한 연습과 탐구로 이뤄낸 성과를 서로 존중하고 축하한다. 클래식 음악에는 그런 멋이 있다. 낭만이 있다.


c2efd54b0abcd90863d3e233fb647691_t.jpeg 대단... 하.... 다.... 나도 언젠간 꼭!

회사 일, 사소한 집안일도 클래식 음악의 그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대부분 지루하게 반복되는 회사일에서 가치를 찾고, 집요하게 탐구하고 연구하여 나만의 결과물을 발표하고, 다른 이의 성과물을 축하하고 거기에서 배우는 연구원의 매일과 닮았다. 매일 아이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며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먹기를 바라는 마음과 사랑을 담는다. 때로는 이런저런 시도를 해본다. 똑같은 아침 시간, 대부분 비슷한 작업이다. 하지만 아이가 깨끗하게 도시락을 비워왔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마음을 쏟아서 해내는 일들. 그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클래식 연주과 닮은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조금은 힘이 된다.


아이와의 협상

문제는 내가 너무 자주 클래식을 튼다는 거다. 내 가족은 클래식을 들으면 졸리단다. "아빠, 최소한 가사는 있는 걸로 틀면 안돼?"라며 아이가 항의하기도 한다. 그럴 땐 플레이리스트 주도권을 딸에게 넘긴다. 그러면 여지없이 K-pop, 특히 요즘은 블랙핑크 로제를 자주 틀곤 한다.


나도 아이돌 음악과 힙합을 주로 듣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취향이 180도 바뀌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신기하다. 어쩌면 음악에서 휴식, 위로, 영감을 찾는 시기인가 보다. 나이가 들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중년의 취미가 좋다.


앞으로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 연주자, 책과 관련해서 블로그를 조금씩 써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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