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공구상이 영감을 얻는 방법
그놈의 영감이 뭐라고!
친구와 함께 그래픽 브랜드를 운영했을 때이다. 크리에이티브한 무언가 영감을 받아야 한다는 명목 하에 참 많은 곳을 돌아다니려 애썼다. 스타벅스 대신에 새로 오픈한 카페, 백화점 대신 개인 편집샵... 우리 브랜드를 어떻게 하면 새롭고 트렌디하게 만들지 고민하는 그 첫 행동이 바로 '영감부터 받아보자!'였다. 아이디어가 안 떠오른다고? 우선은 돌아다니면서 뭔가를 많이 보자는 어린 패기였을지도 모른다.
영감(Inspiration)을 받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무언가를 보고 배우거나, 참고하거나, 연결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거나 사람들마다 제각각의 정의와 행동이 있다. 누군가는 그냥 새로운 무언가 자체를 접하는 게 영감을 얻는 거라고 한다. 이 참 추상적이고 애매한 표현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짧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워낙 나루토 차크라처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표현을 못하겠네..’ 이런 기분이다. 흠... 한 문장으로 비유하면 이럴까? (드라마 '셜록'에서 셜록의 추리 방법을 차용하였다.)
내 머릿속의 책장에 새로운 책을 하나씩 꽂아 넣는다.
일을 할 때 그렇다.
아이디어를 짜낼 때마다 밖의 것을 허겁지겁 무리하게 흡수하지 않는다. 내 머릿속 책장에서 주제에 알맞은 책을 골라서 책상에 펼쳐두고 꼬깃꼬깃 아이디어와 끼워 맞춰본다. 이런 나만의 머릿 책장에 책을 많이 쟁여두는 게 영감을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15,000원 이케아 선반의 책장, 누군가는 하버드대 도서관일 수도 있다. (나는 겨우 4X4 정사각형 책장에 넣은 정도)
전 직장에는 책장에 넣을 책들이 소위 천지삐까리였다. 점심 먹으러 가는 곳이 새로운 식당, 새로운 카페에서 동료들과 수다 떠는 곳도 서울에서 손꼽히는 공원이다. 남들이 예약해서 줄 서서 먹는 곳이 나에겐 평범한 날에 간단한 점심이었다. 눈에 띄기만 하면 죄다 책장에 집어넣는 탈탈 털어먹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쇠향기가 솔솔 흐르는 산업단지 속 트럭맨 공구상인데 도대체 나는 어디서 영감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처음엔 많이 헤맸다.
영감을 얻으려면 새로운 걸 많이 접해야 하는데 그게 힘들었다. 알다시피 공구상은 안정감을 만드는 직업이다. 고객, 고객처에게 안정적으로 산업용품을 제공하는 일이기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해나가는데 인색할 수밖에 없다. 내가 직접 몸소 겪고 난 결론이다. 투자 제안서보다는 고객처 납품이, 새로운 상품 개발보다는 재고 확인이 우선이었다. 사실 새로운 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새로운 건 뭘까? 트렌드에 앞서가는? 누구도 보지 못한? 그런 것들이 새로운 게 아니었다. 나에게 새로우면 그만이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아직 공구상 경험이 많지는 않으니 앞으로 공구업계에서 새롭게 볼 것들이 무궁무진했다. 그냥 내 주위를 조금 더 세심하게 둘러보면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서 영감을 얻을까?
몇십 년 일하신 공구상 사장님들의 가게는 빤히 보는 맛이 있다. 어떤 손님들이 오는지에 따라 제품의 종류가 정해지고 오랜 기간 재고가 쌓이면 그 재고가 소진 목적으로 우선 진열된다. 손님들은 하나를 사러 왔다가 연계되는 제품 배치에 이끌려 10개를 질러버리고 만다. 그 노련한 구매 유도는 내가 당장 몇천만 원 돈을 발라가며 얻을 수가 없다. 바깥에 적절하게 널브러진 제품을 보고 들어와 없던 쓰임새도 갖게 해주는 공구상 사장님들의 제품 진열 알고리즘은 그야말로 끝내준다. 플랫폼 업계에서 그렇게 부르짖던 '구매 경험', 이미 공구상 사장님들이 하고 계셨다. 여기서 판매에 관한 영감을 얻는다.
퀴퀴한 냄새와 분진이 휘날려 피했던 산업현장들을 지금은 절대 지나치지 않는다. 과거 우리 집을 인테리어 해줬던 실장님,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를 정비하는 시설보수팀, 사무실 앞 길 도색작업을 하는 어르신들을 유심히 지켜본다. 어떤 공구를 쓰며 어떤 안전화를 신으며 어떤 공구집을 차고 있는지를 보고 내가 취급하는 제품 라인을 점검해보기도 한다. 고객 제품 사용기를 꼭 온라인으로 받아볼 필요가 없다. 주위 여기저기를 냄새 맡아도 그 생생한 사용현장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고객 니즈에 관한 영감을 얻는다.
DIY 문화가 발달하며 소비자들도 산업재에 친숙해졌다. 오늘의집, 문고리닷컴 등 인테리어 관련 플랫폼에 들어가며 어떤 제품이 잘 팔리는지를 본다. 어떤 가격대의 어떤 사용 난이도의 공구까지 취급하는지 마우스휠질을 해본다. 일차원적으로 제품 자체를 레퍼런스 하기보다는 그다음은 어떤 공구를 쓸지 가늠해보는 재미가 있다. 여기서 공구, 산업용품 트렌드의 영감을 얻는다.
예전 일에 비하여 공구상이 얻는 영감은 보다 직관적이다.
손님이 찾을 제품을 나열하고 거기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출하고 조립한다. 어쩌면 공구상의 영감 받는 방법이 성실히 돌아다니는 게 전부일 수 있겠다. 하지만 얼마나 돌아다니느냐보다 무엇을 뚜렷하게 보고 기억해내는 게 더 중요하다. 예전에 비해 영감을 얻으려는 강박감은 없어진 것 같다. 단지 자연스러워졌을 뿐이다. 이렇게 되려면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고집을 버려야 한다. 내 책장에 책을 무수히 꽂아놓고 중학교 때 배운 경우의 수 콤비네이션, 팩토리얼을 머릿속에 상상하며 무한하게 아이디어를 가래떡처럼 쭉쭉 뽑아내 본다. 이런 재미가 있다. 공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