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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 인디게임, 스탠리 패러블

[#47 Paris] Inspired By Stanly Parable

by 재니정

메타버스라는 개념이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 그 기술적 세계관에 가장 가까운 포맷은 게임일거야. 사실 꽤 하드하게 게임을 즐겼던 유저라면 메타버스라는 개념이 그리 새롭게 와닿지도 않겠지. 오늘은 그 게임이라는 가상세계관 속에서 나에게 꽤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던 인디게임을 하나 소개하려고 해. 2013년에 정식 발매되었던 Galactic Cafe사의 ‘스탠리 패러블 (The Stanley Parable) 이라는 게임이야.


게임은 예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섞인 가장 혼합된 형태라고 생각해.

영화가 관객에게 카메라의 시점만을 보여준다면, 게임은 플레이어들에게 개개인만의 시점과 동선을 제공하거든. 즉 기존의 영화, 글, 이미지등의 미디어가 컨텐츠를 그대로 읽고 해석하는 수동적인 방식이었다면, 게임은 직접적으로 컨텐츠를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바꾸어놓았어. “스탠리 패러블”은 아마 이 예술의 적극적인 수용을 가장 의미있게 풀어낸 인디게임 중 하나일 거야. 오늘날 실제와 CG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고 영화의 시나리오를 방불케 하는 게임들이 나오고 있지만, 결국 게임을 이루는 본질은 플레이어의 ‘선택’이야. A로 갈지 B로 갈지, C를 죽일지, D를 죽일지, 또한 그걸 E로 죽일지, F로 죽일지…. 모든 것은 결국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어.

수천개의 폴리곤으로 이루어져있는 컴퓨터 그래픽과 반전이 난무하는 스토리라인을 모두 걷어내고, 이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진행되는 알고리즘만이 드러났을때, 게임의 구조는 사실상 그리 복잡하지 않을거야. 이 알고리즘을 얼마나 세밀하고 촘촘하게 짰느냐가 좋은 게임을 결정한다는 얘기를 하는게 아니야. 이러한 게임의 알고리즘과 플레이어의 선택, 그리고 얻게 되는 보상. 이 개념들에 질문을 던진게 스탠리 패러블 게임 철학의 주제의식이야.



‘게임의 주인공 '스탠리'는 거대 빌딩에 입점한 회사에서
'직원 427'로 근무하고 있다. 그의 427번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통해 내려오는 지령대로 키보드의 버튼을 누르는게 일이었으나
어느날 갑자기 아무런 지령도 내려오지 않게 되고
다른 직원 동료들도 사장들도 갑자기 사라져 버리게 되어
원인을 찾기 위해 회사를 탐험한다.’
(출처 - 위키피디아)


게임이 시작되면 플레이 내내 계속되는 내레이터의 음성안내에 따라 게임을 진행하게 돼. 내레이터는 플레이어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가야할 길 또는 행동을 알려주는 역할을 해. 가령 앞에 문 두개가 놓여져있다면 “스탠리가 열린 두개의 문 앞에 도착했을때, 그는 왼쪽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라고 말하는 식이야. 플레이어는 내레이터의 지시대로 왼쪽 문으로 들어가 정해진 동선대로 플레이를 계속 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의 말을 어기고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자유의지를 통해 플레이를 할 수도 있어. 이때 내레이터는 플레이어를 다시 올바른 동선으로 유도하기 위해 설득하기도 하고,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화를 내거나 초월적인(?)힘을 이용해 게임의 공간을 컨트롤하기도 하는데, 이때 나오는 각기 다른 내레이터의 반응을 보는것이 이 게임의 백미이지.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이야기가 목적지에 없더라도,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목적지가 없는 이야기를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단순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우리의 여정에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
필연적으로 목적지가 나타날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는거 아닐까요?
스탠리, 왜 그렇게 생각하는거죠? 왜 이 게임을 깰 수 있거나 이길 수 있거나,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거죠? 당신이 이곳에 있는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기나 하세요?”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난 사무엘 베게트의 부조리극이 떠올랐어. 기존 희곡의 내러티브 구성을 모두 파괴하여 현대인의 삶의 무의미성을 보여준 바로 그 연극 기법말이야.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부조리극 안에서 인물은 사물(object)과 다를것이 없어지며, 시간과 공간은 현실성을 잃고, 극에서 나누는 언어조차도 그 기능을 상실하게 돼. 즉 부조리극이 전달하는 주제는 결국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목적없이 세계를 표류하는 존재”라는 사실이야.

(뭔가 지금의 메타버스에 대한 여러 전문가들의 우려와 회의감과 비슷한 얘기라고 생각되지 않아?)


특별한 줄거리도, 어떠한 사건이나 결말없이 내러티브의 개념을 극단으로까지 밀어붙이는 부조리극의 기법은 스탠리 패러블의 작법과도 많이 닮아있어. 게임이 시작할때 동료들이 모두 사라져 혼자 고립되어 남아있는 스탠리의 상황이나, 내러티브의 지시를 따라가지 않고 게임 스토리를 엉망으로 진행했을때 점점 붕괴되고 해체되어가는 사무실 배경의 모습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부조리극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있어.

결국 이 난해한 상황속에서 남는 것은 그러한 상황에 처해진 우리의 모습과 그것이 던져주는 질문이야.


과연 그 목적이 없이도 선택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왼쪽 문을 거부하고 오른쪽 문을 선택한 것은 게임의 의도와는 정반대되는 선택이지만 이 게임에서는 그 목적없는 선택을 통해 게임의 다른 면모(엔딩)를 엿볼 수 있게 되고, 그것을 총체적으로 의도한 것이 스탠리 패러블의 미학이라 할 수 있어.


스탠리 패러블은 앞서 언급했듯, 게임이라는 예술 형태가 적극적 (그리고 상호적) 수용방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도 철학적으로 잘 살린 예시야. 그리고 이 “선택”이라는 개념은 기존의 전통 예술(영화나 미술 또는 책)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기 때문에 게임을 가장 혼합적인, 미래 형태의 예술로서 자리매김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기술이 점점 더 발전해가고 있는 이 시기에 머지않아 새롭게 등장할 기술/예술 장르들은 모두 유저의 “선택”에 따라 형성되는 상호적인 형태들로 이루어질거야.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미디어 아트들에서 우리는 이미 그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지. 그렇게 된다면 선택없이 수동적으로 컨텐츠를 소비하는 우리를 보면서 어디선가 이런 내레이션이 들릴지도 모르겠어.

“뭔가를 하라고요! 무엇이든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해요.

이게 필요해요. 이야기가 그걸 필요로 해요.”


2022.02.09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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