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든
30대 중반이었다. 잡지 회사의 팀장이었고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마 겉으로는 굉장히 멀쩡해 보이는 도심의 직장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수년간 계속되었다. 이 월급으로 계속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월세를 내고, 카드값을 갚고, 엄마 생활비를 드리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딱 생활비 뿐이었다. 무언가 더 필요하면 크레딧 카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적자의 나날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직업이야 말로 빛좋은 개살구야."
"빛이라도 좋으면 다행이게?"
"회사 시스템이 포장마차와 다를 게 없어. 모든 게 주먹구구야."
"포장마차가 우리보다 수익이 더 높을 거 같은데?"
"그럼 포장마차를 할까?"
마감을 끝내고 다크서클 만개한 동료들이 나누는 자조적 대화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일은 지겨웠다. 매주 영화계의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말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감흥이 없는 사람을 만나거나 재미없는 영화를 보고 난 후, 안 좋은 감상을 돌리고 돌려 비교적 좋은 말로 치장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괜찮은 문장은 생각나지 않았고 마치 글을 쓰는 자판기처럼 상투적인 말들을 컴퓨터에 입력했다.
회사는 불안했다. 언제나 돈이 없다며 기자들을 활용할 제휴 사업을 찾아와 일을 더 시키는데에만 열심이었다. 주요 수익이었던 영화 광고도 급락했다. 영화계는 잡지 광고에 관심을 잃고 대신 그 돈으로 네이버 검색창에 광고를 했다. "요즘엔 네이버가 노출 최고에요. 도와드리고 싶지만 저희 광고비는 한정되어 있고 노출이 많은 매체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라는 말을 유행가 가사 후렴구처럼 듣던 나날이었다. 팀장이면 이제 다음 단계가 편집장인데 이런 상황에서 영화잡지의 편집장이 되는 건 그다지 환영할 일은 아니었다. 망해가는 산업에서 산소호흡기를 얼마나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 있느냐가 편집장의 큰 역할처럼 보였다. 버둥대면서 버티고 있지만 나아질 희망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이(혹은 택시 기사님이) 보기에 평일 낮 2시에 영화를 보러 가는 '영화기자'란 참 멋진 직업이었다.
편집장은 될 수도 없겠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나의 자질은 편집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자로 계속 머무를 수 없으니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잡지판에서 답이 보이지 않아 문화 기획 강의도 들어보고 꽃집에서 제2의 길을 찾을까 싶어 꽃을 다루는 강좌도 찾아 다녔다.
핫하다는 멋진 곳에서 스타를 만나고 돌아오면 나의 초라한 삶이 더 도드라져 보이곤 했다. 그나마 삶을 서로 위로하며 살았던 친구들은 아이를 낳더니 만나기가 힘들어졌다. 밖에서 보는 건 거의 불가능했고 집으로 찾아가야 얼굴을 편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 대화의 중심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잡지들이 사라져가면서 또래 여자 동료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일을 끝내고 회사에 함께 분노하며 술 한잔 할 친구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모처럼 참석하게된 유쾌한 술자리에서 대부분이 나보다 어리고 내가 제일 연장자라는 걸 깨달았다. 세상이 확 바뀐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때의 내가 좀더 변화에 유연한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나는 나를 둘러싼 이 모든 변화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나 하나도 온전히 챙기질 못하는데 어떻게 편집장이 되고 대선배가 될 수 있을까? 자신감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세상은 광우병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주말마다 촛불시위가 열렸으나 MB는 속이 터질법한 반응만 보였다. 시민의 의무를 다하고자 혼자서라도 촛불시위에 나가곤 했으나 희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MB가 만든 후안무치한 질서는 이미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차별과 갑질에 대한 일상적 보호막같은 게 사라진 듯했다. 성차별적인 발언과 효율성을 따지는 윗사람의 갑질(aka 착취)이 전보다 빈번해지는 걸 체감하면서 한국이 점점 더 싫어졌다.
죽어버릴까? 정말 운좋게도, 나에게는 뉴욕이라는 선택지가 하나 더 있었다. 여자 직원이 결혼하면 회사를 떠난다는 스테레오타입을 강화시키고 싶지 않아 미루고 미루던 선택이었다.
하지만 집앞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정말 듣기 싫어했던 아이돌 그룹의 노래 '오빠'가 들려왔을 때 결심을 하고 말았다. 한국을 떠나자. 이 시대의 이 땅 어디에도 내가 살고 싶은 순간은 없다.
영화를 했던 남편은 어느날 갑자기 미국 시민이 된 아버지를 통해 영주권 초청을 받았다. 하던 일이 안 풀리고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그가 택한 길은 미국에 가서 인생을 리셋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어딘가에 취직하기엔 나이가 많았지만 취업에 나이 제한이 없는 미국에선 먹고 사는 게 가능해보였다. 그럼 나는? 미국에 갈 생각은 딱히 없었다. 뉴욕에 가고 싶은 욕망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데 결국 선택지가 생기다보니 자연스레 비교를 하게 되고 막연한 기대같은 걸 품게 되더라.
"어차피 가난할 거, 뉴욕에서 가난한 게 서울에서 가난한 것보다 더 재미있지 않을까?"라고 환송해주는 친구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적어도 장을 보면서 듣기 싫은 음악을 들을 필요는 없겠지.
먹어볼 것도 더 많겠지.
세상 사람도 더 많이 만나게 되겠지.
영어도 배울 수 있겠지.
제발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든.
월세를 빼니 수중에 보증금 500만원이 남았다. 평생을 모았던 책과 음반과 DVD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동안의 내 인생을 정리해 이민가방 두 개에 나눠 담았다. 아니, 가방 하나는 멀리 딸을 보내는 엄마의 마음이 담긴 반찬들로 채워졌다.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거쳐 뉴욕에 도착하는 동안 나는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혼란스러운 기분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여행도 아니고, 유학도 아니고, 이민도 아닌 것같은 이런 떠남. 남들은 뭐라도 되려고 뉴욕에 갈 텐데 나는 나를 지키려고 뉴욕에 가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싫은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그나마 나을 것 같은 곳을 향해서. 그렇게 되고 싶었던 영화기자였는데. 그렇게 만들고 싶었던 잡지였는데. 이제 모두 안녕. 하지만 다시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니 무언가를 정하진 말자.
아니 정했어야만 했다!!! 인생을 야무지게 사는 사람이라면 30대 후반에 이렇게 훌쩍 별생각 없이 경력을 제멋대로 중단하고 세상밖으로 훌쩍 떠나버리진 않는 법. 어쨋거나 뉴욕에 와서 살았다. 살아 있고 살고 있다. 이민과 생활의 길고 긴 혼란의 터널을 지나고 난 뒤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