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의 열일곱 번째 단어: 친구
내가 좋아하는 밴드 9와 숫자들의 ‘검은돌’이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나의 병명은 만성적인 후회’. 이 노래를 들으며 친구에 대해 글을 쓰려니 복잡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나의 병명은 만성적인 후회. 매번 잘하고 싶기만 한 스스로를 100%로 좋아하는 일은 조금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타인으로 빈 곳을 채웠다. 사람이 들어온 자리는 온기가 가득했다. 그치만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는 말처럼 비어버린 공간을 견디기 어려웠다.
난 타고난 인싸는 아니다. 필요 이상의 말에 서툴기도 하고, 말을 재미있게 하는 재주도 없다. 여전히 첨언하는 게 어렵기도 하다. 보통은 말하는 걸 좋아하는 인싸들의 옆에 내가 있다. 나는 발화보단 경청이 그나마 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친구 사귀는 게 싫었던 건 아니다. 언젠가 엄마가 ‘친구가 그렇게 좋니?’라고 물었다. 대답은 ‘완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양손이 무거운 날이 있다. 내가 손에 쥐고 들어온 물건 중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명치 부근이 꽉꽉 들어찬 느낌은 확실했다. ‘이 정도면 완벽해...’라고 생각할 때 작업이 시작된다. 문 밖으로 종이와 테이프가 이리저리 날린다. 별 유난을 다 떤다는 표정으로 가족들이 쳐다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온갖 색종이, 라벨지, 사진들을 오려 4절 하드보드지를 빼곡히 채우던 애. 하드보드지는 접히지도 말리지도 않아서 등굣길 버스에 한 손에는 티머니 버스카드를, 남은 한 손에는 몸뚱이만 한 종이를 들고 타던 애. 그게 나다.
왜 그렇게 까지 하냐 물어보면 그때는 그게 유행이었다. 그렇게 꾸며서 주는 게 모종의 증표였다. 전교를 통틀어도 내가 제일 잘 만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커다란 마음을 받을 친구가 좋아할 걸 생각하면 마음이 들떴고, 동시에 이 사람은 내게 이만한 존재라고 스스로 증명하고 싶던 것 같다. 4절지만큼의 마음이라고. 그렇지만 그 자리는 비워지고 채워지고를 반복하다가 또 텅 비어버렸다.. 그렇게 그만뒀다. 가끔은 조금 외로웠다. 누군가 찾아오지 않으면 쓸모없는 저-기 어디 시골 어귀 버스정류장 같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를 나로 채울 수 없다면, 남을 붙잡아둘 수도 없다면, 항상성에 대해 기대하지 않으면 됐다. 4절지만큼 비워져 있던 공간은 이제 매일 다른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다. 프로페셔널 이벤트 플래너가 된 마음으로 지내고 있고 꽤나 즐겁다. 이번에 들어오실 분은 조용한 분위기로 하면 되겠군, 저번 분은 리뷰가 아주아주 좋았어...
그래서 친구들에게 자주 하게 된 말이 있다. 나는 그냥 여기에 있으니 언제든 들리라고. 난 이젠 덜 외로우니까 나갈 때를 걱정하진 말아. 인심 좋은 에어비엔비 호스트처럼 멀끔히 치워진 공간을 준비할게. 합의되지 않은 기대감을 혼자 품고 상처 받길 반복했던 10년 전 열다섯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들풀 같은 마음을 지녀보라고. 만성적인 후회로 언제나 비어있는 그 공간을 잘 쓰는 어른이 될 거라고.
bgm : 9와 숫자들 - 검은돌
by. 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