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엄마의 편지

잔잔의 열여덟 번째 단어: 편지

by 잔잔 janjan



어느 날 이모가 엄마에게 말했다. “너는 딸이랑 친해서 좋겠네~” 그러나 엄마의 대답은 “우리 별로 안 친한데?”였다. 내가 바로 옆에 앉아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딱히 섭섭한 기분이 들지도 않았고 엄마의 말에 반박하고 싶지도 않았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이모에게 “네 뭐 그런 편이죠~”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우린 그런 사이였다.


음,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아니다. 겉모습은 모녀관계라고 말 안 해도 누구나 알아볼 정도로 닮았고 성격도 비슷하다. 겉도 속도 본인을 꼬옥 빼닮은 딸. 뱉어내는 말보다 삼키는 말이 많은 자신과 같은 아이에게 엄마는 글을 자주 써주었다. 생일에도, 어린이 날에도, 새해에도. 그래서인지 나도 글을 쓸 때는 말할 때보다 더 과하게 쏟아내나 싶다.


엄마는 강하다. 구시대적인 발언과는 다른 맥락으로 쓴 문장이다. 그는 세상이 규정한 것에 지지 않으려 했고 다행히 절대 쉽게 지는 사람도 아니었다. 세상에 대항하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그저 악착같이 해냈다. ‘내가 이걸 다 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나는 해냈어.’ 그 마음을 내가 하루아침에 박살 냈다고 생각하면 여전히 미안하다. 엄마를 생각하면 마구 울컥거린다. 미안해서. 미워서. 고마워서. 여러 가지 마음이 나란했다.


하루는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신나게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니 기분이 180도 바뀌었다. 모든 집이 그렇듯 우리 집도 나름의 가정사가 있었고, 하필 잔뜩 취한 그날 뜬금없이 폭발해버렸다. 어떠한 기우도 없이. 집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엄마는 그 일 이후로 며칠간 일언반구도 없었다. 내가 날카롭게 내던진 말을 그는 단번에 이해하진 못했겠지. 내가 아는 그는 가진 것 중에 최선과 최고만 내놓는 사람이다. 그런 자신이 이루어 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자식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하나 다행인 것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빠르게 이성을 되찾는 사람이란 점이었다. 엄마는 여느 때처럼 책상 위에 편지를 놓고 갔다.


그의 편지는 총 세 장이었다.

처음엔 최선을 다한 자신을 부정한 나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듯 보였으나 그는 나를 위해 최대한 짧게 슬퍼했다. 남은 공간엔 자신이 미처 몰랐던 것에 대한 반성과 나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가 가득했다. 앞서 말했듯 엄마에겐 참 많은 편지를 받았지만 이 편지는 달랐다. 편지에 죽고 못 사는 나지만 펼쳐볼 엄두도 나지 않았던 낱장의 종이들. 이제는 그때보다 시간이 지나 자란 만큼, 딱 그만큼 더 이해하게 됐다. 엄마의 편지의 일부를 옮겨본다.





오빠로부터 얘기를 듣고 많이 놀랐지. 특히 엄마 아빠에게 한 행동을 전해 듣고 많이 미안했을 것 같다. 엄마도 많이 놀랐어. 사랑해줬다고, 충분히 엄마의 마음을 전달했다고 생각하며 지냈는데 해인이가 그 마음을 몰라줬다고 생각해서 실망스러웠고 너의 욕심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데 계속되는 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무엇이 너를 그렇게 밀어냈을까. 우리의 무엇이 너를 그렇게 아프게 했을까를 생각해본다.


엄마의 지론은 사랑은 주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거고, 받는 사람의 감정만큼 이 그에게 전달된 거라고 생각해왔지. 그 생각에 미루어보면 너는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도 따스함도 느끼지 못했던 거야. 물론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만 너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그 부분에 항상 부족함이 있었고 그것에 대해 너는 많은 아픔을 간직했을 거라 생각한다.


미안해 해인아.

생각해보니 너는 엄청 예민하고 감정선이 여린 아이 었어. 그런 아이를 엄마의 무딘 감정과 이성으로 대했으니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을 거라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한번 엄마가 너를 좀 더 세심히 보듬지 못한 점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 일은 엄마에게 중대한 사건이 될 것 같아. 엄마도 엄마를 뒤돌아 볼 것이고 너도 아마 너를 계속 추론하겠지. 하지만 꼭 아픈 기억으로만 보진 않을 거야. 강인하게 아픔을 도려내고 좀 더 다정하게 네게 다가설게.


그동안 엄마는 너무 바빴고, 앞만 보고 달려왔거든. 근데 이제는 시간도 많이 남고 여유가 생겼어. 너에게 더 많은 사랑과 배려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훌쩍 커버려서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네가 힘들고 외로울 때 엄마를 떠올릴 수 있도록 좀 더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도록 노력할게. 술을 빌었지만 네 아픔을 말해 줘서 고마워. 엄마가 뒤를 돌아보게 해 줘서 고마워. 진심으로 사랑하고, 남은 시간 더욱 사랑하며 살자.






그래.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한 엄마는 바빴다. 매일이 바빴다. 그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출산 직전까지 경기도에서 마포로 출근을 했고, 시집살이를 하며 두 아이를 키웠다. 여전히 몸에 밴 습관과 책임감에 이끌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일곱 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지하철로 한 시간 거리를 따라 출근을 한다. 그렇게 출근을 하며 엄마 부서에는 여성 직원이 10% 정도. 무엇하나 쉽지 않았다.


일-회사-육아 삼각지대에 힘이 부친 그녀는 ‘끝까지 일만 할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왔겠지. 버텨온 것이지만 그 안에서 크고 작은 도전을 잃지 않았다. 언제나 자기 자신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매일의 성취였을 것이다.


그래 엄마는 너무 바빴고 앞만 보고 달려왔을 뿐이다. 이 편지에 내가 바로 답신을 했더라면 좋았을까? 그 후로 무수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종이를 다시 펼쳐보지 못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기 전, 잠시 집을 길게 비우기 전에서야 답장을 쓸 수 있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출국이 코앞으로 다가왔어요. 준비를 하면서도 통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전날이 되니 설렘 반 걱정 반입니다. 빠르게 지나고 있는 이십 대에 제가 한 선택 중 손에 꼽는 큰 도전이 될 것 같아요.


그간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학생 때는 꽤 무탈하게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사춘기가 뒤늦게 와버린 건가 싶어요. 술을 핑계로 엄마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죄송한 마음입니다.


일 년 동안 짧은 사회생활을 해보니 보지 못한 장면들이 보였어요.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면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루들. 지친 몸과 정신을 이끌고 퇴근하면 가끔은 말할 힘도 없다는 걸요.


엄마의 3,40대는 그렇게 치열했음에도 저의 10대는 따뜻하기만 했다는 게 사랑이었단 걸 이제야 알게 됐어요. 사랑한다는 말이 전부가 아니란 걸 조금 늦게 배웠어요. 언제나 제 선택을 믿어주던 엄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게 지지해주던 엄마, 조금 무모한 욕심에 내린 결정에도 그저 끄덕여줄 수 있는 것이 엄마가 줄 수 있는 전부였던 거죠?






긴 편지. 그가 쓰고, 내가 읽고, 내가 다시 쓰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긴긴 편지였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너머로는 또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았다. 엄청 친하지는 않지만 서로 은근하게 좋아하고, 가끔은 질투하고, 자주 자랑스러워하는 시간을 지났다. 평소와 비슷한 시간의 흐름이었지만 두 편의 편지가 있기 전과는 아주 다르다.


어릴 적에 엄마가 편지를 자주 써준 게 고맙다. 편지로 마음을 받은 기억을 남겨줘서 고맙다. 아픈 기억도 글로 덜어내고 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보여줘서 고맙다. 말이 조금 서툰 사람들. 당신의 치열함을 그늘 삼았던 나는 비슷한 모양의 어른이 되고 싶다. 우린 때론 말이 부족하지만 몰라서 말을 아끼는 건 아닐 거다. 그저 서로 이해하고 있거나 어쩌면 가끔은 편지를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이엔 앞으로도 편지가 필요할 거야.



by. 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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