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살아가며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
< 당신은 어떻게 걷고 계신가요? > by DD
모임에서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울할 때 더 우울한 노래를 들으시나요? 아니면 신나는 노래를 들으시나요?
우울한 감정을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자주 데미안 라이스의 The Blower's Daughter을 들으며 눈물을 짜던 다소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죠. 저는 우울함을 느끼면 한 없이 아래로 기어들어가 바닥을 찍어야 위로 올라오는 사람이었거든요. 어쩌면 우울한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최근에 이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없더라고요.
우울한 감정을 지나는 일에는 많은 에너지와 (다른 의미의) 열정이 드는 것 같아요. 이십 대 초반엔 한 껏 우울해할 여유와 힘이 있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으슬으슬 몸살이 들 것 같을 때 미리 약을 먹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자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불안한 마음이 들 땐 77마리의 귀여운 아기동물이 나오는 영상을 보며 머리를 텅텅 비우거나 세상의 기호에 관한 미친 듯이 지루한 다큐멘터리를 틀어 기절잠을 자는 것을 택했습니다.
모임의 몇몇 친구들이 저의 말에 매우 공감해주었습니다. 어렸을 적 보던 어른들이 왜 그리 무던하고
덤덤하게 살아가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긴 인생에서 보면 무척이나 어린 나이임은 틀림없지만 스무 살 초반의 나와 지금의 나는 짧은 새에 많이도 달라진 것 같아요. 그때보다 재미가 없어졌지만,
살짝 건강해졌습니다(아마도요).
확실한 것은 저라는 인간의 채도가 낮아진 느낌이 듭니다. 자꾸만 봤던 영화만 다시 보고, 들었던 노래만
듣고, 자주 가던 익숙한 곳만 찾고요. 목소리를 내는 것에 쉽게 지치고, 여전히 그대로인 아니 더 나빠지는
것만 같은 현실에 분노보단 실소가 먼저 나오기도 해요. 왜 잘못되었는지 설명하는 대신 흐린 눈으로 빠르게
넘어가버린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나 자신이 문득 소름 끼치게 싫을 때가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부족하고 이기적인 나의 모습에 죄책감이 밀려들어오곤 해요. 나는 결국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말이에요.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는 세상. 무섭게 끓고 있는 이 갈등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올지,
아니면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갈지 우리는 전혀 알 수가 없어 더욱 두려울 뿐입니다.
저는 거대한 흐름 속에 휘말려 '어쩔 수 없었다'는 서글픈 변명을 하는 늙은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아
등골이 서늘해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여전히 어찌할지 모르는.
초라한 밥그릇을 들고 남 탓을 하는 그런 슬프고 화가 난 사람 말이에요.
"어차피 세상은 망했어!"라고 소리를 치면서요.
변명쟁이 노인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저는 언젠가 아주-아주-아주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끔찍한 싸움이 끝나지 않는 세상이라 자꾸만 까먹기도 하지만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저의 두려움에 공감하시나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걸어야 할까, 하고
막막한 두려움이 찾아올 때가 있으신가요? 아니면 그저 열심히, 열심히 걷고 계신가요?
변명쟁이 노인이 되지 않도록 발바닥이 아프게 걷고 있는 분들에게 제가 가끔씩 떠올려보는 문장을
나누어드리고 싶어요.
"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몇 해 전 축산업과 환경에 관한 다큐멘터리 <카우스피라시>를 보다가 마주친 문장입니다.
자꾸만 변명거리를 떠올리는 비겁한 인간이 될 것만 같을 때 주문처럼 외워보는 말이에요.
우리가 걷게 될 길은 분명 어려움이 가득할 것 같습니다. 두려움이 영영 사라지지 않고 성가신 존재처럼 따라붙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두려움을 보고도 못 본 척하지 않을 때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적어도 저 한 사람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