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의 동선 마지막 이야기
안녕, 오랜만이다!
우리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더라. 요즘은 매일이 비슷해서 며칠 전이 어제 같고 그러네. 넌 어제 뭐 먹은지 기억나? 나는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떠올랐어. 내일은 오늘 뭐 먹었는지 또 기억 못하겠지? 기억하지 못할 나날들을 보내고 있나봐.
오늘 아이폰이 ‘과거의 오늘’ 사진을 모아서 보여줬어. 언제, 왜 찍었는지 모를 네 사진과 길고양이 사진, 그리고 흔들린 만두 사진이 있었어. 엉망진창인 사진을 보니까 막힌 숨이 트이는 것 같아. 과거의 오늘엔 너랑 어딘가에 갔었네. 잔뜩 신나 보이는 우리가 부럽기도 하고 마음이 놓이기도 해. 우린 만나면 저렇게 즐거운 사람들이구나 싶어서.
오늘은 잠시 밖에 나갈 일이 있었어. 근데 너도 알지? 우리 집에서 어지간한 곳에 가려면 한 시간은 기본으로 걸리는 거. 지하철에 몸을 싣고 한 정거장 두 정거장 … 스무 번은 넘게 지하철이 멈출 때마다 어떤 장소들을 떠올려. ‘다음에 가자고 해야지’하는 싱거운 생각이랑 같이.
우리가 좋아하는 카페에 새로운 케이크 나온 거 알아? 왠지 네가 좋아할 것 같아. 오늘 서점에 갔는데 벌써 내년 다이어리랑 달력이 나왔더라. 벌써라고 하긴 좀 늦은 감이 있니? 연말이 됐으니까 온갖 소품샵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다이어리도 사야지. 사놓고 쓰지 않을 스티커나, 마스킹 테이프 같은 것도 괜히 사야지. 한 번도 다이어리를 다 써본 적 없는 내가 매년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도 말리지 않아 줘서 고마워. 아, 그리고 어젠 자기 전에 먹방을 보다가 새로운 맛집도 찾았어. 두꺼운 옷 뭉텅이에 몸을 욱여넣고 잔뜩 힘을 주고 걸어가는 거야. 보글보글 끓는 전골 앞에서 몸을 녹이는 한겨울을 상상해.
“다음에 가자, 같이 가보자.”
이 시답잖은 약속이 왜 이렇게 좋을까? 지키지 못해도 마냥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상한 걸까? 가볍게 건넨 약속은 금세 사라질까? 그래도 난 잊어도 되는 약속을 하는 게 좋아. 까마득해진 과거의 약속을 잊어도 나는 또 새로운 것을 보며 너를 떠올릴 테지.
종종 유치한 약속을 하며 지내자. 시간 속에 어색해진 안녕을 주고받기보단 다음을 이야기하자. 우리 언제 만났는지 기억도 잘 못 하면서 너무 입만 살았나 싶지만, 영영 너를 못 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그래. 어차피 우리는 또 만날 거잖아.
어쩌면 다음 주에도, 다음 달에도, 나이를 얼마큼 더 먹은 후에도 만나기 어려울지 몰라. 우리 너무 바쁘잖아. 시건방 떠는 세상에서 이를 갈며 살아가니까 힘도 들고 말야. 그래도 난 앞으로도 좋은 데를 보면 네 생각이 날 것 같아. 너는 또 어딘가로 우직하게 걸어가겠지. 그런 너에게 필요 이상의 응원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아.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하면서 지낼게. 습관처럼 하는 싱거운 약속엔 너에 대한 믿음과 응원이 다 들어있어서 우리 사이는 그리 낯간지러울 필요가 없지. 그래서 좋아.
편지는 이만 줄일게. 우리 그럼 거기서 만나자. 그게 내일이든 아주 멀기만 한 나중이든 약속한 다음으로 가자. 다음에 거기에서 보자.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