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가장 이기적인 인간은 나의 남편이다.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아는 사람. 그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알며 그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 그와 연애하던 때의 일화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회사 생활 3년 차 사수님이 책을 한 권 선물해 주셨다. 바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다. 이기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가 도대체 왜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한 건지 궁금했다. 꽤 두꺼운 과학서였지만 열심히 읽었다.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행동은 유전자적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의 생존과 종족 번식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다.
책을 덮자 허탈감이 밀려왔다. 내가 받았던 선의의 마음부터 사랑, 우정까지 모조리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나처럼 느낀 사람들이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오기도 한다는 글이 책에 실려 있었다. 당시의 남자 친구이자 지금의 남편에게 책 내용을 들려주었다. 나는 도무지 이 책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유전자의 집합이 인간이라지만 인간이 유전자 자체일 수는 없지 않으냐고. 우리가 가끔 이기적이긴 하지만 항상 이기적이기만 한 동물은 아니지 않냐고.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편이 말했다. “이기적인 마음 없이 온전히 타인만을 위한 행동은 단 한 개도 없어.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경우도 그래. 그 행동을 함으로써 내가 기쁜 거야. 그 기쁨이 이기심인 거지. 연애도 마찬가지야. 상대를 필요로 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거거든. 나는 네가 필요하고 너는 내가 필요한 거야.”
할 말이 없었다. 정말 그랬다. 나부터가 이기적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상황과 생각들이 분명해졌다. 그의 말은 내가 들었던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네가 필요해"라는 말은 온전히 자신과 나를 위해 만들어진 듯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남자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고백처럼 느껴졌다.
2년 가까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감성적이고 생각이 많은 나와 가끔씩 대립이 있긴 하지만 보통의 부부처럼 잘 살고 있다. 혼자 고민이 길어질 때마다 그에게 묻는다. 멍청한 질문을 해도 늘 명쾌한 해답을 준다. 때때로 오류가 나기도 한다. 대체로 나에게 해주는 조언을 본인은 실천하지 않는 경우다. “롤모델은 더 뛰어난 사람으로 해야지. 나? 나는 롤모델 없지. 아 일론 머스크는 좀 멋있더라. 근데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아”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다. 나와 결혼하더니 약간 이상해진 것 같다. 어쨌든, 그런 그가 나를 위해 요리를 한다. 내가 일하러 간 사이에 아이들을 돌본다. 불평불만 한마디 없이 묵묵히 자기 일을 한다. 그리고 나 없이 혼자 잘 논다. 이 점이 가장 맘에 든다. 보면 볼수록 지금 그에겐 딱히 내가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남자가 나이가 들면 여성 호르몬 분비로 마음이 여려진다는데 그때가 되면 좀 다르려나. 살다가 고비를 마주하게 된다면 단단해 보이는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당신에게도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