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민한 편이다. 회사를 가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인간관계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나니 하나둘씩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눈치를 많이 본다거나 해야 할 말을 제때 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러다 보니 나의 예민함은 더욱 심해졌다. 친한 선배는 마른 사람은 다 이유가 있다며 농담을 했다. '내가 예민하다고?'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같은 상황에서도 남들보다 더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 내가 싫었다. 부모님의 기질과 양육방식, 자라온 환경 때문이라고 탓했다.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온갖 노력을 했다. 유튜브에 '예민한 이유' '단호해지는 법' 따위를 검색했고 매일 밤 스님들의 글과 말을 마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전혀 다르게 사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이건 타고난 거구나, 내 기질은 절대 바꿀 수 없구나.'
머리가 큰 사람이 평생 헬멧을 쓰고 산들 머리가 작아지지 않는 것과도 같았다(나도 나름 머리가 큰 편이다 TMI). 평생 나라는 사람을 바꾸기 위해 정성을 쏟는 바보 같은 짓을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이놈의 예민함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5단계 예민 대응 매뉴얼 본격적으로 파헤쳐 보기로 하자!
<예민함에 지지 않고 살아남는 5가지 방법>
1. 자각하기, 단 분석은 금물 2. 즐길 수 없다면 피하라 3. 평균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오력 4. 감정을 쏟아낼 공간을 만들기 5. 추천하는 3멍 : 운멍, 그멍, 산멍
1. 자각하기, 단 분석은 금물 예민함을 자각한다. '네 또 왔니?'하고 반갑게 인사한다. 이 상황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바로 내가 왜 예민한지를 분석하는 일.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골손님을 맞이하듯 자연스럽게 일단 그 녀석을 자리에 앉힌다. 아무렇지 않은 척 녀석의 상태를 살펴본다. 감당 가능한 놈인지 아닌지를.
2. 즐길 수 없다면 피하라 사람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바닥을 보이게 되는 법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더 이상 그 바닥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생계가 지장을 받지 않는다면 피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이전에 다니던 회사는 개발 업무의 특성상 프로젝트 기간에 업무시간을 내 맘대로 조정할 수 없었고 야근이 잦았다. 그런 이유로 육아휴직 후 복직을 망설였다. 아이들을 돌보며 이전처럼 쫓기듯 일을 한다면 나의 예민함이 다시 고개를 들어 일과 육아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을게 분명했다. 그래서 과감하게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프리랜서를 선택했다. 물론 또 다른 새로운 고민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최소한 시간적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하고 있다.
3. 평균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오력 만약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내 경우 내가 어떤 상황에서 예민함을 느끼는지를 먼저 떠올려보았다. 대부분 신체적 컨디션이 좋지 않은 때 평소보다 더 예민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컨디션을 조절하면 좋을까? 답은 단순하다. 잘 먹고 잘 자기. 수면의 양과 질은 좋은지, 평소보다 식사량이 줄진 않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체크한다. 나아가 운동을 꾸준히 한다. 체력이 오르는 것은 기본이고 입맛이 돌아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 그래서 나의 운동 제1목적은 '평균의 상태를 유지하기'다. 이에 맞게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운동량을 조절한다. 몸이 힘든 날은 가벼운 스트레칭과 걷기를 통해 텐션을 끌어올리고 컨디션이 좋은 날은 다음날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강도 높은 운동을 한다. 이래도 안되면 가장 마지막 수단으로 당 충전에 돌입한다. 이 방법은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지만 자주 사용하면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주의 요망.
4. 감정을 쏟아낼 공간 만들기 이 모든 노력에도 풀리지 않는 마음들이 있다.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들이라 단번에 해결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 경우 어딘가에 내 마음을 털어내면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수다 떨기도 좋지만 내 경우 글에 내 마음을 털어놓고 나면 한바탕 울고 난 듯 기분이 풀린다. 남에게는 털어놓기 힘든 내 감정이나 나쁜 생각까지도 훌훌 글로 적어낸다. 손이 가는 대로 3- 4페이지 적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왠지 글에는 교훈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인가! 남이 볼까 두렵다면 적고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왠지 소중해서 계속 가지고 있고 싶어 진다. 글이란 게 그렇다.
5. 추천하는 3멍 : 운멍, 그멍, 산멍 예민해지면 생각이 많아진다. 내 경우 멍 때리는 연습이 큰 도움이 되었다. 추천하는 멍 때리는 방법으로는 운동, 그림, 자연 보기다. 운동은 아무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땀이 나는 고강도 타바타 운동이나 근력운동을 추천한다. 그림은 너무 어렵지 않으면서 결과물도 제법 그럴싸 해 보이는 게 좋다. 컬러링 혹은 여유가 된다면 아이패드에 드로잉을 해보기를 추천한다. 새로운 재능과 기회를 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 방법은 자연 보기, 나는 산을 좋아해서 운동 겸 등산을 한다. 바다를 좋아한다면 푸른 바다만 바라봐도 행복하지 않을까? 멀리 나가기 어렵다면 영상이나 소리로 접해보길 바란다. 자연의 힘은 생각보다 위대해서 압도되는 무언가가 있다.
아니 예민함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노력해야 하나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경우 그 녀석을 마주하기 싫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웅크리고만 있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재미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어떤 식으로든 이 녀석을 끌어안고 살아야 할 텐데 가능하다면 재밌게 살고 싶었다. 그리하여 녀석을 가두는 대신 녀석이 항상 기분 좋게 뛰놀 공간을 만들어갔다. 이렇게 말하니 예민한 게 꼭 나쁜 것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오히려 예민함의 덕을 볼 때도 있다. 수많은 생각 속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남다른 관찰력이 생기기도 한다. 그중 단연 최고는 연애상담이다. 예민한 연인을 만난 친구가 힘들어할 때면 "이런 마음일걸?" 하고 훈수를 두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덧붙인다 "안 변할 거야" 친구가 절망한다. "다만 자기의 예민함을 받아들이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르겠지."
형태는 제각각이겠지만 누구나 이런 면 하나쯤은 있다. 거기에 단점이라는 이름을 붙일지 아니면 기질이라는 이름을 붙일지는 결국 내가 결정한다. 웬만하면 나의 기질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구워삶아 내 편을 만들지 고민해보면 어떨까. 어쩌면 그런 고민들이 차곡차곡 쌓여 삶의 무게중심을 바꾸고 새로운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