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고을 신인문학상 당선작 (67회 2차 정기공모)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첫사랑이 헌사랑에게 물었다. 낡고 지지부진하여 거추장스럽기만 한 다 헐어가는 사랑이 너무 가엾단다. 보기에도 민망하고 주름진 얼굴과 살빛들도 남의 것인양, 너무 멀어져버린 첫사랑에서 헌사랑은 남의 것이라는 거리에서 설움을 감추거나 울부짖으며 물었다.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충분하지, 그럼, 당연하지. 그런데 왜 망설일까? 성경에서는 죄가 하느님과 거리를 멀게 하였다고 하지. 첫사랑이 죄를 지었을까? 헌사랑이 죄를 숨겼을까? 죄가 첫사랑을 헌사랑을 주인했을까? 죄가 없었다면 첫사랑은 별일 없이 무고했을까?
나는 근 8년간 정교사(正敎師)가 되기 위해 석사과정에 입학하고자 했지. 오래전 60년대 교사는 중학교만 졸업을 해도 가능하였었다고해. 놀랍잖아? 그건 중학교만 졸업을 해도 그 시대적 삶이 행복이라는 틀에서 무고했기 때문이었겠지. 놀라운게 아닌거야.
핀터레스트(Pinterest.com)에서 이미지를 저장하여 브런치스토리(Brunchstory)에서 준 ‘작가’라는 신분으로 글을 쓰고 매거진도 만들고 있어.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나 포스터 등을 벽에 붙여두고 즐거워하는 맘들이 깨끔하고 싱그러운 브런치들을 먹는 행복감이라고 할 수 있을거야.
번번히 실패를 하거나 뒤돌아 오는 일들은 참 아쉽지만 우리 흔히 아는 발명왕 에디슨도 둔재 취급 받았다고 하잖아? 새벽을 달리는 소리들은 모두 건강한 움직이들이기도 하고 그 건강한 움직임을 염원하는 바람들이기도 한 것이지.
전자신문이나 인터넷뉴스들을 모르거나 전자매체가 없어서 종이신문을 보는 건 아니야. 나는 피해망상처럼 위기감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나의 이 문제없던 25년이상된 일상을 도둑맞고 있다는 현실감들이었지. 즉, 우리집 종이신문 구독길을 자신들 구독으로 바꾸려고 하거나 자신의 과거라고 판단하는 머릿속에서 탈피하고 싶은 것이지.
‘자기방어기제’라고 들어 봤니? 요즘은 흔한 말이 되었지만 보편화 되었다고는 볼 수 없을 거야. 심리상담소들도 참 많다는 걸 알고 있니? 나는 내가 심리상담사 자격을 취득 할 때 까지도 예측불허 상태였고, 겨우 정신병원의 존재에 경계를 했던 것 뿐이었지. 우울이 넘쳐 지옥을 넘나든다 여길 때는 심리상담소를 이용하길 바래. 그건 정신질환으로 진입 전 상태를 서로 대화로 치유하는 참 다행인 과정들이거든.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라는 한 마디는 대단한 경구(警句) 같지만 우리 대한민국 국내 제작 1992년 개봉영화 제목이지. 그때 내 가슴에서는 어떤 칼이 자라고 있었을까, 불신(不信)이었을까?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불안들이었을까? 나의 죄로 인한 나에 대한 부정과 사랑이 뒤섞인 애증들이었을까
그러나 나는 정당한 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무사히 통과하여 오늘을 살며 그 날들을 회상하며 그 날들의 자리들에 발을 내딛어 보기도 했었지. 나의 청춘의 사랑과 꿈이 가득했던 날들, ‘죽은 시인의 사회(1990)’가 나 자신이라고만 여기던 밀착된 나에 대한 연민들.
로빈 윌리암스도 가고, 그의 위트와 코믹도 같이 사라졌지만 나는 기억 하려해. ‘말 한 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 잊었니? 그건 속담이라서, 성경에 없으니, 성경 애독자와 성경 절대신앙자들은 믿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참 슬픈 일이야.
시트콤(situation comedy)이 그리운 요즘이지만 가을이라 어긋날 것 같아. 하지만 낭만의 긴 옷자락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아마 감초처럼 필요할 것 같아.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매우 쉬운 일이거든. 나 항상 여기 있으니.
©정안나
■심사평
정안나 작가의 <재회>
<재회>는 첫사랑과 헌 사랑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 과거와 현재 개인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갈등과 화해를 다룬 서정적 에세이다. 한 사람의 기억과 삶의 단편들이 엮이며 인간 내면의 상처와 갈등과 회복 그리고 재회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거운 현실과 가벼운 회상을 연결시키며 사랑과 삶의 의미를 고민하게 한다. 첫사랑은 순수했던 자신을 나타내며 헌사랑은 세월과 상처로 인해 달라진 현재의 자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첫사랑이 헌사랑에게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은 곧 자신을 치유하고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갈망으로 읽을 수 있다. 고립과 무고함과 갈등이 이들의 대화 속에 깃들어 있어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 서사 속에서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을 짐작할 수 있다.
일상의 단순한 변화들이나 사회의 기대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방어와 심리적 고립감을 느껴왔다. 화자는 종이 신문 구독에 집착하며 과거의 안정감을 되찾으려는 모습에서도 잘 드러난다.
불안과 불신으로 상처받았던 시절을 돌이켜 보며 내면의 칼이 “슬픔을 자른다”라는 표현은 상처를 극복하고 성숙한 자아를 발견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단순히 첫사랑과 헌 사랑의 재회를 넘어서 잃어버린 자아와의 화해를 의미한다.
화자는 자기 독백적 성찰을 통해 많은 질문을 만들어 내며 답을 이끌어 낸다. 작품의 구성이 탄탄하며 독특한 화자만의 스타일을 고수한다. 그 점을 높이 사며 작가로서의 자질이 보인다 하겠다.
먼저 등단을 축하하며 한국 문단에서 대성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합평
■당선소감
현재기온 7°C , 대체로 희망스럽다. 지구가 없다면 지금 우리는 존재할 수 있을까? 가장 쉬운 자기진단으로 볼 수 있다. 나는 지구에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얼만큼 유익을 선물했는지 살펴볼 일이다. 2010년 모 청소년 신문에서는 환타지(fantasy)로 여길만한 우주시대를 예견하였고 이미 개인용로켓 혹은 개인용우주여객선이 미국 부호 스타들로부터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 적이 있다. 벌써 14년이 훌쩍 넘은 시간 속에서 얼마 전에는 진실로 우주관광기업 ‘버진 갤럭틱’에서 상업용 우주비행을 할 수 있는 여행티켓이 무려 800장 예매를 마쳤다고 한다. ‘달(Moon)’에 관한 명상이 수포로 돌아가는 날들인 것이다. 즉, ‘달이 여자’라는 전래동화적 믿음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인간이 우주와 동일시 되는 판단은 이미 오래된 동양사상적 관행으로 계몽이 우선 필요함에도 이 믿음에 대한 과신의 위용에 나약한 인간은 그저 비루하게 죽어가고 있을 뿐인 것이다. 청록파(靑鹿派)를 배출한 순수문예지적 『문장(文章):1939.02~1941.04』의 숨결을 닮거나 그대로 잇는 듯한 『문학고을』에 수필로 신인(新人)이 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본향에 대한 그리움은 모든 인간이 지니는 기본적 평안을 향한 이면으로 결코 부정하거나 놓을 수 없다. 다만 발전하는 현대와 미래사회가 그 인간성을 어떻게 유지하고 유익을 누리며 병행 할 수 있느냐다. 그러나 이 또한 태초부터 차이와 반복처럼, 그 비참한 지구 역사의 날들 이전이나, 전쟁들 부터서라도 언제든지 있던 복지사회 구현적 행복의 조건 밑그림들이었던 것이다. 서로의 알 권리에 충실하기만 하여도 세상은 조금 더 평온하고 평등해지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가족 간에도.
(등단비를 들여 등단 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나, 미약微弱한 글 채택하여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늘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오랜 세월간의 모든 분들과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정안나
감사합니다
©정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