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좋아한 노래들(My favorite songs)
꿈을 꾼대로
안녕이란 말 대신 사랑한다고 했지
떠나간지 어느새 너는 나를 잊었나
기다리지 않아도 다시 온다고 했지
한 송이 꿈을 남기고 떠난 너를 못잊어
나를 사랑한다고 다시 돌아 온다고
한 송이 꿈을 남기고 떠난 너를 기다려
-작사: 지명길, 작곡:정태춘
「한 송이 꿈」을 이루고 왔으나 나는 연신 "잘못했습니다."를 중얼거리는 중이다.
그러나 또한 다시, 가고 온 그 거리 혹은 길이란 바로 내 하나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것들에 불과하여 옴이 감이며, 감이 옴인 자리들인 것이다.
2024년 11월 7일 마감 임박으로 「문학고을」에 수필 두 편으로 응모를 하였고, 2000년무렵부터 내곁에서 그야말로 아주 작은 대화창, 크롬창만한 페이지로 시작되었던 「엽서시문학공모전」을 펼쳐보고 2025신춘문예를 기웃거리다 늘 낙선중으로 쓴 고배에 지쳐 다정함이 스며든 문학고을에 노크를 하였는데, 하루만에 신인문학상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었다.
기성 당선자들은 익히 알만한 내용들로 제 아무리 좋은 작품일지라도 당선이 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이 전면 온 세상에 노출이 되는데 괜찮겠느냐는 기본 의식이 전면에 가득한 두려움이 앞선 것으로 이를 사전 확인하는 것과 같은 절차가 있던 것이다. 이제 내가 드러나도 가족이든 이웃이든 오래된 고향친구들과 오래된 사회친구들에게도 나의 안부겸이라도 드러남이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것으로, 흔쾌히 스스로에게 재확인을 하고 가족들에게도 이미 브런치스토리로 군불을 지피듯 세상에 드러남의 효과를 미리 전했음으로 이를테면 브러치스토리는 예방주사였던 셈이다.
물론, 이미, 인터넷 글쓰기로는 1999년부터 시작된 개인 ·가족홈페이지 만들기를 「사이버주부대학(이후 변경 후:미즈넷)」가입 후, 업로드 된 무료 웹제작 프로그램들을 통하여 시작하며, 가족 소개 페이지들에서부터 조금씩 드러냈었지만, 그 홈페이지의 기본 베이스는 다니던 교회의 활동을 인터넷에서 실현해보자는 의미로 복음 전파가 중심이었던 것이다. 성경의 좋은 말씀들을 카드로 만들고 인터넷속의 이웃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 그리고 부활을 기쁨으로 전하던 중, 스스로 고질병이라 여겨왔던 어린시절 문학소녀 감성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 글쓰기 문학회, '부표 우리라는 이름의'에 가입을 하고 칼럼까지 쓰던 날들도 지난 학창시절의 효과가 당연했던 것이지만, 공식적인 작가, 수필가의 자격이라고는 할 수 없었던 것으로 직업란에 문학인이라는 자리를 스스로 주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된 것이다. 「부표, 우리라는 이름의」 문학회는 나름으로 2005년 출판사로 발전하여 많은 책들도 출판을 하였으나, 갑작스럽게 만9년만에 늦둥이를 잉태하던 나와는 별개가 되듯, 하지만 아닌듯 한 상황들속에서 내 안에 많은 갈등이 발생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2005년 산고의 고통을 나는 몸으로 행하고, 「도서출판 부표」는 글과 지면으로 새생명을 출산하며 기쁨과 고뇌를 함께하듯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부표 동인 아닌 동인들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칼럼 쓰기 이후, 내가 가는 길을 알린 적이 없었고 나는 별도로 다른 학과의 길을 가며 취업과 잉태와 「국립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입학하고 늦둥이 셋째를 낳고 그렇게 만20년이 된 지금이다.
내 기억속 「한 송이 꿈」은 1976년이다. 정확성을 위해 검색해보니, 「시인의 마을」과 「촛불」의 정태춘 아저씨의 군시절 작곡한 「장마」를 레코드사에서 「한 송이 꿈」이라는 제목으로 지명길 작사, 정태춘 작곡 이수만 노래,로 1975년에 발표 했었다는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나의 기억이란, 1976년 당시 초등학교 2학년 만8세던 내가 따라 부르기 쉬워 금새 흥얼거리며 동네 한 바퀴를 돌던 때들이었다. 그 때는 알 수 없었던 그저 재미난 리듬과 「한 송이」,라는 아름다운 어감과 그에 준하는 상큼한 미성이 맘에 들어 단 하나의 단어도 틀림이 없이 지금도 기억하는 노래지만, 몇 십년이 지난 후 보니, 외할머니의 기도와 함께한 곡이었던 것이다.
외삼촌은 1975년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일때 육군에 입대를 하셨고, 입대 며칠전 머리를 짧게 깎고 어색하게 들어 오시던 생생한 모습은 이제 외삼촌 것이 되었던지 아련하기만 하지만 참, 그리운 사랑의 추억들인 것이다. 그러한 이면에는 늘 외할머니의 간절한 기도들이 한 순간도 빠짐없이 상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외할머니는 기도로 외동아들 외삼촌을 낳으심과 같으셨던 것이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온갖 사랑을 다 받으시고 태어나신 외삼촌께서 군입대를 하신다시니 걱정이 태산 같으셨던 것이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군대에서 제대로 건강하게 제대를 하는 군병들이 많지 않았다던 때들로, 상이군병으로 돌아올까 싶어 매월 보름에 다니시던 깊은 산 속 절간의 부처님전에 늘 빌고빌고 또 빌으셨던 감동의 정성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도 외할머니처럼 되야지~'할만큼 외할머니의 진심은 나를 행복하게 하시던 사랑의 징표들이셨던 것이다. 조석으로 마주 앉으시던 부뚜막 위에는 볏짚의 불티가 내려 앉아 검댕이가 묻은듯 하지만, 매일 밥을 지으실때마다 한 숟갈씩의 쌀을 그 큰 소주병에 담아 두시고 짚푸라기로 만든 뚜껑으로 닫고, 그 옆에는 늘 흰대접에 정화수(井華水)가 올려져 있었다. 외할머니의 삶의 방식이셨던 것이다. 나는 외할머니의 입으로 씻은 김치를 먹고 자란 외손녀로 외할머니의 모든 감정이 내것이 되듯 살게 되었던 것도 틀리지는 않았을 것으로 '나도 정화수를 떠놓아야지~'도 하여 한번쯤은 외할머니께 허락받고 물을 떠 올려드렸지 싶다. 어찌되었든 그러한 참사랑으로 군입대 길이 나고 입대후 더더욱 걱정이 태산 같으셨던 외할머니는 이제나저제나 편지 올날만 기다리셨던 것이다. 입대 후, 어느날 항상 큰 가방을 메시고 "편지요~!" 하시는 우체부 아저씨가 소포를 두고 가셔서 열어보니 외삼촌께서 입대하시던 날 입고 가셨던 옷들이 가지런하게 접혀져 있었고, 눈물이 왈콱 쏟아져 외할머니와 나는 둘이 앉아 소리도 없이 울었었다. 즉, 3년간 군대생활 건강하게 잘 마치고 돌아올거라는 그 꿈의 증표가 하나 도착했던 것이었다. 그땐 정말 군입대는 성경속의 말씀처럼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나 소처럼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근심이 기본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6·25전쟁을 직접 겪으셨던 기억들이 있기에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기도는 끊임이 없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후 6·25를 알게 된 어느날은 외할머니도 전쟁을 겪으셨을 것이라는 판단에 어떻게 그때를 기억하시는지 궁금하여
"할머니, 할머니는 6·25동란때 어떻게 하셨어요?" 여쭈니,
"저기 뒤안 팽나무 밑에 굴을 파고 들어가 숨어 있었지. 우리 가족 모두랑 동네사람들과 같이."
"예? 진짜요?"
"그럼."
나는 태중(胎中)친구와 같은 단짝친구와 늘 소꿉놀이를 하던 담장 아래에서 우리집 팽나무 아래 하얀 흙을 흰조가비에 담아 밥을 짓고는 했는데, 그 하얀 흙이 나오던 그 자리 밑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 전쟁을 피하시고, 6·25 당시 만네살 이시던 나의 친정엄마는 친언니와 외할머니와 동네어르신들 품에서 바깥에 공비들이 다니는지 살피며 숨죽여 사셨다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외삼촌은 6·25 종전 6개월즈음에 태어나셨었다.
나의 글쓰기의 첫번째 등장은 외삼촌께 외할머니 안부를 답하여 보내드리는 군사우편이었던 것이다. 편지가 오면 담장 하나로 이웃하는 친구집 외삼촌 친구분이시자 친구의 외삼촌이시던 삼촌께 달려가 편지를 읽어오시던 외할머니셨는데, 내가 학교에 입학 후 한글을 읽게 되면서부터 받는대로 내가 읽어드리기 시작하였고, 답장도 드리게 되었었던 것이다. 그 첫번째 편지가 9살때 드린 가을날의 편지로
'뭐라고 써요 할머니!',라고 하며
외삼촌께서 사용하시던 작은방에 배를 깔고 누운채로 외할머니께서 불러주시는대로 받아 적었던 편지였다. 푸른하늘이 다 들어오는 봉창문 두 짝이 모두 열린채로 그 아래 누워
'오늘은 보리타작을 했어요. ......'라고
일반 편지지 줄칸의 하나 반칸이 넘는 큰 글씨로 써서 보내드린 생애 첫번째 9살 초등2학년 편지였다. 제대하시던 날 한보따리 짐을 풀어보며 깜짝 놀랐었다. 그 안에는 두꺼운 검정색서류철로 표지된 편지뭉치가 내 국어책 대여섯 권은 되도록 면사무소 서류처럼 가득 정리 되어 있었고, 나는 감동하며 내가 보내드린 편지도 있나하고 찾아보니, 정말 그대로 있어 너무 감사했었다. 그날부터 나의 독서는 하교후 외삼촌 편지 읽기였고, 군대 입대 후로는 두고 가신 외삼촌 일기장 몰래 훔쳐보기였다. 외삼촌의 일기장은 양장본으로 된 365일 일자별 인쇄된 지금도 판매중인 상표의 일기장으로 소중한 책이 아닐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사모곡에 감동하여 나는 나의 효심을 외삼촌 일기장에서 배웠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나의 첫 한글도 외삼촌께 미리 학교 입학전에 낱자와 이름을 익혔던 것이다. 숫자는 성냥쌓기 놀이도 겸하며, 성냥개비로 하나씩 세워가며 1부터 10까지 가르쳐 주셨고, 편지를 처음 썼던 날처럼, 배를 깔고 누워 봉창문 아래에서 성냥개비와 공책에 숫자공부를 하다, '그것도 못해! 또 틀렸다~',하고 꿀밤도 맞아 보고 하지만 나는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으로 '날마다 외삼촌께서 가르쳐주시면 좋겠다',던 때들이었다.
외삼촌께서는 외할머니의 한송이 꿈을 이루며 제대를 하셨고, 다시 서울로 입대전 다니시던 법무사 사무소에서 부르셔서 재입사를 하시게 되셨고, 그렇게 가시면서 군입대 하시며 주시던 것과는 의미가 다르게 완전히 내게 금성라디오를 선물로 유물처럼 남겨 주셨던 것이었다. 꿈만 같았던 라디오와 하모니카는 드디어 나의 소유가 되었고, 밤낮으로 내손에서 떠나지 않던 것도 당연하였다. 밤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설거지를 하시는 외할머니를 지키며, 안방 아랫목에 누워 라디오를 이불 속에 넣고 잠들고, 9시 무렵 「김자옥의 사랑의 계절」은 나의 생애 기반처럼 여겨져 울며 웃으며 설거지 마친 외할머니와 같이 잠자리에 나란히 누워 듣기도 하였었다. 창호지 빛으로 들어오는 아침햇살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라디오를 켰고, 주파수 맞추는 일이 시작이었던 그 때, 라디오 듣느라 지각을 하는 경우도 흔했던 것이 맞는 것이었다. 나는 라디오매니아였었다.
한 편, 이수만 아저씨는 첫눈에 '어? ㅇㅂ다!'였었다. 키도 작고 마르고 눈도 단추구멍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수만 아저씨처럼 고향 동네 남자친구도 그러했었다. 그 친구집에는 토끼를 기르기도 했고, 아주머니는 나를 어여삐 보시고는 하셨는데 하루는 동네 아주머니들을 태운 경운기에 몸을 싣고 재미삼아 칠산바다로 조개잡이를 갔던 날, 친구 어머니 아주머니는 그만 물이 차오르는 바다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시고 돌아가시고 마셨었다. 나 역시 덜컥 겁이 났던 순간이 있었는데, 조개를 한 자루씩이나 잡고 난 후 돌아오는 갯벌의 물길에서 조개를 씻는 도중 갑자기 물이 허벅지까지 순식간에 차오르는 순간, '아,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잡은 조개 자루는 버리고라도 나오고 싶은 맘이 중심되어 마저 씻지 못한 조개를 들고 '안나야! 빨리 나와! 물 들어온다~!'고 재촉하시는 아주머니들 따라 불이나게 나왔고, 경운기를 타고 돌아왔는데 한참 마을 근처로 들어오며, 누구랄 것도 없이,
"어? ㅇㅂ엄마가 안보인다!"
"뒤 경운기로 오것제!", 하였지만
ㅇㅂ어머니는 익사사고로 발견되고 말았었다.
"ㅇㅂ네 사랑방에는 가지 말어! ㅇㅂ엄마를 거기 멍석에 말아 두었으니, 가지말어라!"
"예? 아니, 진짜요? 살아나시지 않을까요?"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멀쩡하시던 분이 갑자기 그렇게 돌아가실 수 있다는 사실에 거짓말처럼 여겨져 확인해보고 싶었고,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살아계시는 분이시기에 내가 가서 인사를 드리면 살아나실 것만 같아 외할머니 말씀을 어기고 몰래 돌아가신지 이틀째 되던 날 친구네 사랑방가로 난 동네 골목을 살며시 걸어가보았다. 망설이며 친구집 대문을 기웃거려보니 동네 어르신들과 친구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문득 섬짓함에 뒷집 큰집으로 그냥 가고 말았다. 나는 아마 진정 「한송이 꿈」을 부르던 만8살(아홉살) 소녀였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친구집 사랑방을 늘 지나던 보통 일상이 있던 날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와 나는 「한 송이 꿈」에 결속이 되어 있었고, 먼 후일 이수만 아저씨의 「모든 것 끝난 뒤」까지 행복과 우울을 함께 동행하듯 한 것이 사실이었다.
김수철씨의「못다핀 꽃 한 송이」는 「한 송이 꿈」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좋은 노래는 처음 부른 가수와 더불어 다른 가수를 통하여도 계속 리바이벌이 되는 것이 정통이나 다름이 없지만 「한송이 꿈」은 이수만아저씨 한 사람에게서만 재생중이기도 하다. 원곡을 앞설 재생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농공학과 졸업생으로 컴퓨터를 공부하려고 미국으로 떠나면서 활동을 중단했던 공백기에 발매한 것으로, <행복>, <세월이 가면>, <파도>, <한송이 꿈> 등 히트곡을 수록한 컴필레이션 음반은 1983년의 독집 앨범으로, 1974년 TBC 라디오 「바바팝스」 진행을 맡으며 라디오 DJ와 행사 진행자로 활약한 후, 1976년에는 MBC 라디오 「청춘은 즐거워」를 진행했고, 1977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 「이수만과 함께」의 진행([네이버 지식백과] 내진정 당신을 / 행복 - 이수만 (가요앨범 리뷰, 박성건))을 맡은 저력들이 어디 갈리는 없던 것이다.
내가 말한 잘못이란 「브러치스토리 작가」 자격을 격하하지는 않았느냐는 자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금이 걸린 대회에서만 분발하듯 하고는 아무 실익이 없는 듯함에서는 쉽게 돌아서는 나 자신이 냉정 혹은 불온하다 여긴 것으로 그러나 생각해보면 각종 대회나 백일장 장소로 치환시 종료시간 이후로 귀가할 시간에 속하므로 그런 걱정은 무관할 수 있다는 판단이 이제서야 다가오는 나인 것이다. 2024 「제12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당선과 상금 500만원을 겨냥하며 시작했던 이 브런치북 「내가 좋아한 노래들-My favorite songs」은 마감일 며칠을 앞두고 낙선을 예상하며 쓰던 「한 송이 꿈」을 가사만 적어두고 그만 작가서랍에 넣어 두고 말았었다. 뒤늦게 시작한 이유와 각축전이 느껴져 떨리기도 했지만 그러한 내 자신에 대한 자존감 상실이 상처가 되었던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엘리트문학의 산실」로 100년을 지향하는 「문학고을」에서의 수필 신인문학상 당선이 기우는 맘을 끌어 올려 주어 참으로 다행이었고, 마지막 브러치스토리 발행이 벌써 6개월째 되다니 실로 놀라운 것이다.
-커버이미지 : Pinterest/ 56c95e75bc94893d61a05484f62e1699.jpg
-Writer : Evergreen정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