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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넘어파 Aug 04. 2023

퀵 오토바이를 보면 생각나는 여학생

<순간의 힘>

플로리다주 아멜리아섬으로 휴가 갔다가 집에 돌아온 ‘크리스 헌’의 가족은 다소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휴가지에서 숙박한 리츠칼튼 호텔에 아들의 기린 인형 ‘조시’를 두고 온 것이다.(아마 조시는 어린 아들의 애착인형이었나 보다.) 인형이 없이는 잠을 자지 않는 아들을 어떻게든 재워야 하는 크리스는 아들에게 ‘조시는 우리보다 더 긴 휴가를 즐기고 있다’고 둘러댔는데 그의 거짓말이 효과 있었는지 아들은 가물가물 잠에 빠져들었다.


조시를 찾기 위해 크리스는 호텔에 연락했으며 천만다행으로 호텔의 직원에게 조시를 찾았다는 회신을 받았다. 크리스는 아들에게 조시가 호텔에서 휴가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안심시킬 요량으로 호텔 직원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다. 조시가 수영장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 것이다.


며칠 후 조시와 함께 두꺼운 사진첩이 동봉된 소포가 집에 도착했다. 사진첩에는 수영장의 긴 의자에 누워 있는 조시의 사진뿐만 아니라 골프 카트를 모는 조시, 앵무새와 장난치는 조시, 스파에서 마사지받는 조시, 심지어 호텔 보안실에서 감시카메라 화면을 보고 있는 조시의 사진도 있었다. 크리스와 그의 아내는 호텔의 ‘예상치 못한 뜻밖의 친절’에 너무 기뻐했으며 그의 아들은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크리스는 블로그에 글을 올렸고, 글은 이내 인터넷 전체로 퍼져나갔다.

<리츠칼튼 호텔이 보내준 기린 인형 '조시'의 사진>


크리스의 가족은 리츠칼튼 호텔이 보낸 소포를 받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리츠칼튼 호텔이 크리스 가족에게 최고의 호텔로 기억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2013년 교사 2년 차 때, 중학교 3학년 담임을 하고 있었다. 재기발랄한 여학생 세은이는 어느 날 몸이 좋지 않은지 오전 중에 조퇴를 했다. 집에 잘 도착했다고 연락한 세은이는 같은 반 친구 민주(가명)에게 그날 오후에 중간고사 시험 준비 요약문을 빌려주기로 했었는데 그걸 집에 가져와 버려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걱정했다. 민주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 급한 것 아니라고 내일 빌려줘도 괜찮다고 전해 달라 하여 세은이에게 걱정 말고 푹 쉬고 내일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고 했다.(사실 민주는 공부와는 별로 친하지 않은 학생이어서 자신이 요약문을 빌리기로 했다는 사실도 깜빡하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날의 장면이 떠오른다. 퀵 서비스 오토바이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오더니 나를 찾는 것이 아닌가. 생전 퀵 서비스 같은 것은 받아보지 못한 내가 의아해하며 뭐지 하고 받았는데 세은이가 민주에게 빌려주기로 했던 요약문 1장이었다.




‘크리스 헌’ 가족의 경험은 순간의 힘(칩 히스, 댄 히스)에 소개된 일화다. 저자는 오래 기억되고 깊은 의미를 지닌 짧은 경험을 ‘결정적 순간’으로 정의하며 결정적 순간을 의도적으로 창조하는 전략 중 하나로 ‘각본 깨트리기’를 제시한다.


예상되는, 예상할만한 친절은 받는 이에게 그저 그런 나쁘지 않은 경험을 준다. 나쁘지 않은 경험은 기억에 오래 남지 않는다. 하지만 각본을 깨트린 ‘예상치 못한 뜻밖의 친절’은 받는 이에게 특별한 경험을 주며 그 사람의 뇌리 속에 깊이 박혀 오래오래 기분 좋게 기억될 것이다.


민주가 그 요약문 덕분에 시험을 잘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세은이의 ‘예상치 못한 뜻밖의 친절’은 친구 민주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와 그때 우리 반 학생 모두 그날 이후로 퀵 오토바이를 보면 재기발랄한 줄만 알았는데 누구보다도 진중했던 여학생 세은이의 모습을 기분 좋게 떠올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주 가끔씩 안부를 전해오는 세은이는 작년에 카이스트를 졸업했다.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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