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드라마는 미국에서 제3외국어로 일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보기 시작했다. 일어를 익히는데 아무래도 도움이 된다고 일본어 선생님이 말씀해주셔서다. 아무래도 미국에 있을 때라 일본 드라마라던지 영화를 접할 기회가 많이 없어서 어쩌다 빌리게 된 DVD를 여러번 돌려보는 식으로 하다보니 나중엔 자연스럽게 대사를 외우는 식으로 공부가 되었다. 그래서 초기엔 일본 친구에게 그 대사를 활용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건 남자애들의 말투야.'라면서 교정을 받기도 했다. 그런 실수를 하게 된건 다 키무라 타쿠야 씨 때문이다.
이후에는 비교적 폭넓게 접할 기회가 생겨서 한국 드라마보다 오히려 일본 드라마를 볼 기회가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나중엔 취향을 반영해서 수사물 위주로 보다보니, '범인'을 '호시 (별)'라고 한다던가, '사건'을 '야마 (산)'라고 한다는 식의 경찰 은어를 많이 알게 되어서 딱히 일본어 공부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자신이 없다.
한동안은 보지 않던 일본 드라마를 하나 보기 시작했다. 지난 시즌에 나온 것으로 제목이 '미스터리라고 말하지 말지어다 (ミステリーと言う勿れ)'라는 드라마다. 어미인 ~勿れ는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엔 무슨뜻인가 했지만, 일단 미스터리물을 좋아하니까 보기 시작했는데, 꽤나 흥미로웠다. 여기서 어미인 ~勿れ는 동사 원형에 붙는 '부정명령형'인데 고어라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형사들이 나오긴 하지만, 주인공은 통찰력 예리한 대학생이 주인공이라 수사물은 아니고, 그 대학생의 추리가 스토리를 이끌어 가긴 하지만, 사건들이 유혈낭자한 사건들은 아니라 본격적인 미스테리물이라거나 추리소설류의 장르도 아니다. 범죄를 저지를 사람들을 반드시 벌하거나 자살로 몰고가는 교훈과 응징이 강한 보통의 일본 추리물과도 다르다. 장르가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너무 신선하고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원작이 있다면 한번 읽어보고 싶을 정도였는데, 만화가 원작이라고 하니 구해보기는 좀 힘들 것 같다.
아직 안본 사람들 중에 보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심한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지만, 만약 보실 예정이시라면 내용이 약간 드러나니까 이 이후로는 읽지 마시라~ 요무 나카레~ 読む勿れ~
드라마 내내 등장하던 미스터리한 소녀의 정체. 교우관계 편협한 너드 주인공 대학생이 드물게, 어쩜 인생 처음으로 맘을 주게 된 그 여성의 정체가 친부의 학대로 고통받던 소녀가 만들어낸 다중인격 중 하나라는 설정은 참 충격적이었다.
앞문장만 읽어서는 설정이 비약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묘하게 설득이 된다. 요는 그 대학생이 알게 된 소녀는 원래 소녀의 인격이 아니라 다중인격 중 하나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람이 아닌건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인간 조건'에 대한 철학적 영역까지 도달하게 된다) 원래의 소녀가 완치될 것이기 때문에 그 다중인격 중 하나인 소녀 (?)는 이 세상에서 없어질 것이라는 설정이다. 처음부터 거의 마지막 회까지 정체가 불투명한 수수께끼의 소녀였는데, 끝날 때엔 '소녀가 완치되면 자신은 사라질 것'이라며 이별을 고한다.
난 로맨스 드라마 보면서 이별 장면 나오고 나면 방송국 게시판에 '둘이 사랑하게 해주세요.' 쓰는 타입은 아니었고, 딱히 이 둘의 사이에 러브라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인연이 유난히 애절하고도 안타까웠다. 이는 두 사람의 사랑이 극 중에서 이뤄지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그 다중인격의 하나인 존재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컸던 것 같다. 만약 드라마의 주인공인 대학생 청년이 그 소녀의 원래 인격의 주체와 나중에 친하게 되더라도 원래 그 주인공이 애틋하게 여기던 소녀는 아닌 것인 셈이다. 게다가 그 다중인격의 하나로서의 존재일 뿐인 그 소녀는 건강해진 원래 인격의 소녀를 만나더라도 아는척 하지 말아달라고도 부탁을 한다. 현실이라면 그 학대받은 소녀가 가장 불쌍한 존재겠지만, 또 그 소녀가 완쾌된다면 기쁜 소식이겠지만, 드라마 속에서는 그 학대 속에서 탄생해서 원래 인격의 소녀를 대신해서 고통만 받으면 제대로 된 인생의 경험은 한번도 못해보고 세상에서 없어져야하는 그 다중인격 중 하나인 소녀의 모습이 더 가슴아팠다.
추리물을 좋아해서 보게 된 드라마였지만, 엄밀히 말해 추리물이라고 하기엔 다소 부족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드라마에서 전개되는 추리도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이 돋보였다. 또 주인공이 우리가 흔히 별생각없이 받아들이는 사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곤 하는데, 아닌게 아니라 그 이의를 듣다보면 기존의 상식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도 되었다. 오랜만에 생각할 거리가 있는 좋은 드라마를 보게 되어서 기쁘다. 만약 기회가 되신다면 한번쯤 시청해보시길 권한다.
주인공 역의 스다 마사키라는 배우는 일본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보면 자주 보는 유명 배우이긴 한데, 개인적으로 이름을 다시 보며 알게 된건 이번이 처음이다. 다른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을 때엔 너무 가볍다는 인상이었는데, 유명 배우니까 당연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번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연기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실감했다.
또 주제가는 킹누 (King Gnu)라고 하는 밴드 그룹이 부르는데, 유튜브를 통해서 알게된 그룹인데, 뮤직비디오의 예술성이 뛰어나서 눈여겨봤다가 노래도 좋아하게된 케이스. 이전의 드라마 주제곡 중 하나도 너무 맘에 든게 있었는데, 이번에도 "카멜레온"이라는 제목부터 멜로디랑 가사까지 드라마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