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마 아프 클린트 (Hilma af Klint: 1862-1944)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지난 2018년 <<힐마 아프 클린트: 미래를 위한 회화>>전이라는 전시가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렸다는 뉴스를 접하면서였다. 소개에 따르면 그녀는 최초의 추상회화를 그렸다는 바실리 칸딘스키보다 몇 년이나 앞서서 추상회화를 그렸던 여성화가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예술의 중심지에서 벗어난 스웨덴 출신인데다가 여성 작가였기 때문에 이제까지 잊혀져 왔다는 내용이었다.
사실이라면 정말 서양미술사를 다시 써야하는 중차대한 발견이다. 당시에 관심이 가서 여러 기사와 자료를 조금 읽어봤다. 그런데 당시 내가 읽었던 자료에는 힐마 아프 클린트가 아마추어 작가로서 활동을 지속했는데, 문제는 그녀가 단체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풍경화류였다는 점. 그녀의 추상회화 작품들은 실은 그녀가 심취했던 심령회 내지 종교 모임을 위한 작품들이라 은밀하게 간직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만약 자신이 추상회화를 창작하고 있다는 자각 없이 자신들의 종교적 모임을 위해 그렸던 작품으로 최초의 추상화가로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남았다.
몇 가지 의문점과 궁금점에도 불구하고 이후 내가 진행하는 수업에서는 칸딘스키를 언급할 때엔 힐마 아프 클린트라는 작가의 작품들과 함께 언급을 해왔다. 일단 완성도가 높은 추상회화 작품이라 작품성이 높다고 생각했고, 과연 자신이 은밀하게 감추면서 자신의 예술작품이라고 자각하지 않은 작품을 최초의 추상화로 일컬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수강생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였다.
일설에 따르면 칸딘스키의 경우, 자신이 세계 최초의 추상화가라는 타이틀을 갖기 위해 작품의 제작 연대를 앞당겨 고쳐쓰기도 했다는데 말이다. 추상회화를 창조해내고 있다는 의식이 철저해서 창작 연대의 조작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칸딘스키와 자신이 그런한 작품들을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자 했던 힐마 아프 클린트. 과연 우리는 어떤 작가를 최초의 추상회화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후에도 계속 질문은 맘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영화는 힐마 아프 클린트의 출생부터 성장과정 그리고 그녀가 작가로서, 그리고 심령회 교령회에 참가하면서 작품을 제작하게 되는 과정들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작가에 대한 연구를 했던 미술사학자들 그리고 그녀의 작품 전시를 기획했던 큐레이터와 미술관 관계자들의 인터뷰와 함께 그녀가 실제로 생활하고 지냈던 곳들과 다양한 기록들도 함께 보여주었다.
서양미술사에 거장으로 자리잡은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을 위시해서 당시 소위 지식인들치고 '신지학 Theosophy'에 심취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당시 신지학의 인기는 상당해서 전 유럽에 걸쳐 유명 작가들과 예술가들과 지성인들이 신지학 회원으로 가입했었다.
신지학 Theosophy란 러시아인 헬레나 블라바츠키 Helena Blavatsky에 의해 1875년 창시되었다. 당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게 된 것은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물론 힌두교와 브라만 이론, 그리고 고대 종교적 사상을 다 취합한 것이다. 좋은 말 옆에 좋은 말... 고로 틀린 말 하나 없는 이론들의 결정체였던 것이라 더 그런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절이 이런 믿음에 기대지 않고 살기에는 너무도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세월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늘 날 보자면 종교와 철학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한 그 신지학은 유사 종교내지 신비주의에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안하고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그런 세상이 실은 덧없는 현세에 불과하고 더 높은 진리와 영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갖고 싶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빠르기 이를 데없는 21세기라고는 하지만, 20세기 초 과학의 발전에 경이로움과 충격파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19세기말까지 굳건하던 세계관이 당시 과학적 발견이 줄을 이으면서 보이는 세상 너머의 존재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흔들렸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번 시사회에서 상영된 영화에서도 나왔지만, 당시 최초로 전자가 발견되었고, 뢴트겐에 의해 X-ray이 발견되었다. 퀴리 부인의 라듐 발견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대두된 것도 이 시기다. 이제까지 보이지 않아서 존재자체를 몰랐던 세상이 한꺼번에 드러나면서 이제까지의 세계관 전체가 흔들렸던 것이다.
사실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이 최초의 추상회화를 창조해낸 작가라는 의견이 부정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작품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높은 존재의 뜻에 따라 제작되었다는 이야기, 즉 그녀는 일종의 영매였다는 의견 탓이 크다. 나부터도 기존의 아티클이나 평가를 따라 자신의 예술적 신념이 아닌 종교적 신념에 따른 작품을 최초의 추상회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었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영매'의 역할을 자처하는 그녀의 모습에 의구심이 더해졌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역시 자신의 예술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거기에다 칸딘스키의 경우 'publicity'와 '센세이션'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자 하면서 자신이 '최초의 추상화가'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야심이 더해 있었다.
현대의 모더니즘의 족보를 썼던 알프레드 바 Jr.가 있었던 MoMA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위치가 확고하다. MoMA는 그야말로 미술 교과서 속에서 우리가 접하는 작품들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MoMA와 영향력 있는 미술 비평가들과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확립된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에 의한 추상회화의 창조설은 좀처럼 깨지기가 힘든 이유다. 만약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이 최초의 추상회화라는 사실을 인정한 순간 그들이 공고하게 지켜온 족보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 미술사학자들이 그 탓에 기존의 다른 작가들의 정신성은 간과하고 힐마 아프 클린트의 '영매설'에 강조했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로 영화에서 그녀의 <진화 Evolution>이라는 작품을 보여줬는데, 그녀는 이 제목으로 시리즈 작품을 제작했었다. 그런데, 몬드리안 역시 동명의 작품을 제작한 적이 있다. 이들의 사상적 연관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후반에 2018년 구겐하임에서의 그녀의 전시회 <<Hilma af Klint: Paintings for the Future>>의 전시장 풍경이 나왔는데, 진심 가서 보고 싶을 정도로 너무 멋있었다. 목적이 무엇이었던간에 훌륭한 작품들임엔 이의가 없을 작품들이었다. 자신의 작품 전시 위해서는 설화석고로 된 건물이라야한다고도 이야기했다는데, 힐마 아프 클린트의 대규모 전시회가 구겐하임에서 열린 것을 보면 그녀에게 예지능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전에 읽은 아티클에서는 그녀가 추상회화 작품들은 신비주의적 혹은 종교적 목적에서 개인적으로만 소장하고 정작 전시회에서는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풍경화만 전시했다고 써있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것도 사실은 아닌 것으로 밝혀냈다. 당시 명망 높았던 오스트리아의 오컬티스트 루돌프 스타이너 (Rudolf Steiner: 1861-1925)에게 자신의 작품들의 내용을 보여주면서 지지를 요청했지만, 냉정한 거절과 함께 자신의 작품을 폄하하는 답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평생 그녀의 추상 작품들을 꽁꽁 감추어두지는 않고 만년에는 활발한 전시활동도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나니, 결국 그녀의 작품성을 부정하기 위해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철저하게 은폐 내지 무시를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를 알고 미래를 예견한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작품들을 한 곳에 모아 수십년간 전시는 물론 판매도 하지 말라는 유언과 함께 자신의 조카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엄청난 양의 작품들을 상속받은 조카는 달갑지 않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럼에도 그녀의 유지를 지켰던 듯하다. 덕분에 그녀의 엄청난 양의 작품과 방대한 노트북들, 그리고 스케치 등이 고스란히 잘 남아있어서 오늘날 그녀의 작품세계를 재발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언젠가 밝혔듯이 빅토린 뮈렝의 경우에서처럼, 아무리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들이 잊혀진 여성 예술가들을 재발견 내지 재평가하려고 해도 남겨진 작품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힐마 아프 클린트는 잊혀졌을 뿐 아니라 재발견도 불가능한 수많은 여성 화가들에 비해서는 운이 좋은 편이다. 유복한 환경의 귀족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지지를 받아 모자람 없는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여성은 결혼 전까지만 작품 활동이 허락되었던 시대에 평신 독신으로 살았기에 그런 구속 없이 평생 작품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당시 미혼 여성의 경우, 남자 형제가 여성의 경제적 지원을 해야하는데, 만약 여성이 작품활동을 하게되면 경제적 자립을 통해서 남자 형제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기에 정책적으로 허락한 것이다. 이는 당시 늘어나는 미혼 여성들에 대한 대응책의 일환이었는데, 힐마 아프 클린트는 본의 아니게 이 덕을 본 것이다. 그녀의 예지 능력이었든 혜안이었든간에 그녀가 자신의 작품을 한곳에 고이 잘 남기도록 유언을 남겼고, 이를 후손들이 잘 지킨 것도 그녀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어느 한 조건만 어긋났어도 그녀 역시 수많은 잊혀진 여성 작가들, 재발견 내지 재평가도 불가한 상태의 여성 작가들의 반열에 들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여러 작품들 중에서 <백조>라는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들 중에 맨 처음에 게재한 <The Ten Largest, No. 7, Adulthood, Group IV> (1907)라는 작품을 가장 많이 봐서 인상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위의 작품에서는 흑과백의 색조가 대비되면서 한쌍의 백조가 위아래에 배치되어 서로 입을 맞추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녀의 작품이니만큼 그냥 보이는대로가 아닌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남과녀, 밤과낮, 흑과백 등 대체로 양극화에 대한 언급이 많다. 그녀는 '세상이 발전하려면 건강한 딜레마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는 헤겔리안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건전한 사고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통해 그녀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그녀의 작품세계의 재평가에 대해서 찬동하는 의견으로 기울어지긴 했지만, 영화에서 소개된 그녀의 글들에서의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한 것이 여전히 맘에 좀 걸리기는 한다. 자신의 신념의 시각화를 추상회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WU가 그녀에게 있어서는 여성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라던지, 그녀가 '식물, 동물, 숲 속의 이끼 순서대로 탐구하겠노라 천명했던 것이라던지, 파랑, 노랑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와중에 그 중에서 핑크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식의 접근방법이 그러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작품은 지적으로는 이해 불가하며,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작품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접근 방식은 우리가 추상회화 작품을 대하는 방법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어서다. 하지만 이는 에비게일 케인 Abigail Cain의 글에서 언급되었듯이, 미술계의 관심이 지나치게 '누가 추상회화를 발명했는가'에 집착한데서 기인한 의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모더니즘의 신화라는 고정 관념 속에 너무 매몰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2월20일부터 서울 각지에서 상연된다는데 평소에 미술에 관심이 있던 분들이라면 꼭 한번 감상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가지고 있던 의문이 다 풀린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추상회화에 대한 고찰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힐마 아프 클린트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은 분들이라면 애비게일 케인의 아티클도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는 바다. 연말에 좋은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ikonik art에도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