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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윤정 Oct 26. 2024

초록색의 두 얼굴:
생명과 독을 품은 치명적 색의 역사

초록색 치명적 색의 역사

봄에 돋아오르는 새싹과 새순들만큼 가슴설레게 하는게 또 있을까?  ‘신록’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자연의 싱그러움이 떠오르니 말이다. 난 보라색 계열 중에는 검정색이 섞인 짙은 자주색 계열을 더 좋아하지만, 초록은 아주 쨍하고 선명한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자연속에서 발견하는 '신록'은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지만 말이다. 


물감으로 만드는 초록색이야 파랑과 노랑색을 섞으면 된다는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이면 다 알 것이다.  그러나 초록색의 역사를 조금 더 파고들어 보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초록색은 대부분 화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 아니라 화학 염료 중에서는 유독성이 가장 높은 색이라는 것이다.  이는 엄청난 반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초록'하면 제일 먼저 딱 떠오르는 것이 나뭇잎이라 그런지 생명력과 자연을 연상시키는 색상이니 말이다.  영어로도 마찬가지다.  'green'은 “to grow”라는 의미의 고대 영어 동사 “growan”에서 유래했던 것이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19세기 말 파리에서 사랑 받았던 술 압생트 (Absinthe)의 색깔도 초록색이었다. 그리고 이 술은 이후 독성이 강해서 유통이 금지되게 되었다. 


반 고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전해지는 독성 강한 술 "압생트 Absinthe"  왼쪽) 앱상트 술 광고 오른쪽) 앱상트를 담은 술잔과 앱상트 스푼

초록색!  압생트의 색깔!

초록색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압생트다. 반 고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전해지는 독성 강한 술 “압생트.” 드가를 위시한 에콜 드 파리 화가들이 즐겨 마신 이 술은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에 깊이 스며들었다. 초록 색깔의 압생트는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에게는 창의력의 원천이자 파멸의 상징이었다.


힘든 삶을 사는 여인에게 압생트 한 잔은 그날의 피로를 잊게 해주는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Degas, L’Absinthe (1873) Musée d'Orsay


마네는 이 작품이 꽤 맘에 들었는지 다른 작품에도 이 인물의 모습을 그대로 다시 그려넣기도 했다. Édouard Manet, The Absinthe Drinker (1859)


초록색패션의 금기색에서 인기 색상으로 부상!

미국에 있을 때 읽은 패션 관련 잡지에서 초록색이 한때 패션계에서는 금기시되었다는 글을 읽고 의아했던 기억이 났다. 한 배우가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행사에 등장했을 때, 이를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묘사하였다. 패션에서 금기시되던 초록색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최근 한 패션 관련 기사에서도 ‘금기에서 유행색이 된 초록색’이라는 타이틀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초록 색을 패션에서 금기시한 역사가 깊은 모양이다. 그 잡지의 기사에 따르면, 패션 잡지에서 녹색을 꺼려하는 이유는 인쇄 기법 (CMYK printing)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요는 인쇄했을 때, 녹색이 예뻐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금기시되던 초록색이 프라다부터 보테가까지 2021년 유행색이 되었다. 이유는 초록색이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초록색이 패션의 중심에 서게 된 이유에는 코로나로 인해 전세계가 위축되어 있는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전에 인쇄 기술의 발달이 뒷받침 되었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보테가 그린'이라고 알려진 초록색과 1996년부터 초록색을 애용했던 프라다의 패션


초록색의 역사 - 고대 이집트의 공작석부터 에메랄드 그린까지 

초록색의 역사는 아주 오래전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인들은 공작석(Malachite)에서 초록색 염료를 추출하여 사용했으며, 신 오시리스(Osiris)의 얼굴을 초록색으로 칠했다. 오시리스는 '위대한 초록(Great Green)'이라 불리며, 재생과 생명을 상징했다. 하지만 이들의 초록에 대한 인상은 이후 서구에 이어지지 않았던 듯 하다. 


오시리스 신은 전통적으로 얼굴을 초록색을 칠했고, '위대한 초록색'이라 불렀다고. 피부가 초록색으로 표현되곤 했던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 출처:bbc.com


이후에도 초록색은 르네상스 시대에 공작석에서 추출한 염료로 종종 사용되었고, 페루지노(Perugino)의 <예수 탄생(Nativity, 1503)>에서도 목자의 의상에 초록색이 등장한다. 이렇듯 초록색은 오랜 역사를 지닌 색이었다. 물론 뒤쪽 벽에도 톤이 다른 녹색이 사용되어 있다. 이후로도 초록은 오늘처럼 염료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에 즐겨 사용되던 색상 중에 하나였다.  이는 19세기 말, 자연에서 모티브를 주로 따오던 아르누보의 예술 작품들 속에서도 계속 되었다. 초록은 자주 사용되었고, 이 경우엔 자연을 연상시키기 위해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Perugino, Nativity (1503) Museo Pinacoteca di S.Francesco, Montefalco, Italy 



공작석 malachite  초기에 초록색 염료를 추출하기위해 사용되었던 공작석. 하지만 이렇게 추출된 초록색은 변색이 심하게 되어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고한다.



하지만 서구에서 초록색은 긍정적인 이미지만을 상징하지 않았다. 마이클 파처(Michael Pacher)의 작품 <성 볼프강과 악마(Saint Wolfgang and the Devil)> (1471-75)에서 볼 수 있듯이, 악마는 초록색 피부로 묘사되었다. 성인의 붉은 로브와 대조되는 초록빛 악마는 그 자체로 유혹과 위험을 상징했다. 일견 안정되고 안전한 것과 같은 색으로 위장하고 있는 악마는 우리가 악의 유혹에 쉽사리 빠질 수 있다는 것에서 생겨난 연상일까? 성인의 로브가 붉은색인 것에 선명하게 대비되는 악마의 초록색 피부가 인상적이다. 만약 이것이 동양에서 그려진 것이라면 성인이 초록색의 의상이고, 악마의 피부색이 붉은 색이 아닐까? (어릴적 내가 본 동화책 속에서 머리에 뿔이 나고 뾰족한 이를 가진 도깨비는 죄다 빨강색이었다.) 직접적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동양에서 나무와 숲, 산은 사색의 공간이자 도인의 거처이자 세속에 찌들지 않은 순수한 공간으로 여겨졌지만, 서구의 숲은 마녀가 사는 위험한 공간이었다는 점에서도 서양인들의 사고 방식 안에서 초록색은 위험하고 악한 것이라는 연상이 자라왔나보다.  이러한 녹색 공포와 악몽은 18세기에 접어들면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화된다.   



Michael Pacher (1435–1498), Saint Wolfgang and the Devil (1471-75) oil on panel, Alte Pinakothek


쉴즈 그린의 등장과 치명적 독성

1775년 스웨덴의 화학자 칼 빌렘 쉴르 (Carl Wilhelm Scheele)는 쉴즈 그린(Scheele's Green)이라는 새로운 초록색의 염료를 발명하였다. 밝고 아름다운 초록색의 이 염료는 저렴하여 빅토리안 시대 널리 사용되었으나, 비소를 다량 함유하여 치명적 독성이 있었다.  심지어 이 염료를 이용해 만든 녹색 벽지가 나폴레옹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설도 있고, 이 염료로 만든 녹색 천으로 만든 옷을 즐겨 입던 지체 높으신 공작 부인이 피부염을 앓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듯 생명과 자연을 상징하는 초록색이 사실은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폴레옹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쉴즈 그린 Sheele's Green. 또한 귀부인들이 당시 유행했던 쉴즈 그린으로 염색한 드레스를 입어서 이유를 알지못하고 죽기도 했다고한다.

일견 생명과 자연을 연상시키는 색이 실은 치명적 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매혹적이면서 치명적인 '팜므 파탈'의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진다. 독소를 함유한 섬유, 그리고 그로 인해 연상되는 팜므 파탈. 이 때문일까? 소위 하이패션계에서는 매년 다양한 색상으로 새로운 유행색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초록색은 암암리에 오래도록 금기색이 되어왔었던 것이다. 



초록색의 치명적 매력과 팜므 파탈의 이미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John William Waterhouse)의 <키르케 인디비오사 (Circe Invidiosa)> (1892)에서는 마녀 키르케가 동굴 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초록빛 독을 물에 섞고 있는 모습을 매혹적으로 그리고 있다.  오디세우스를 유혹하였던 마녀 키르케가 독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청명하게 맑은 초록색이 치명적인 독이 들어있는 것과 아름다운 모습의 키르케가 실은 냉혹한 마녀라는 것이 어우러져 신비로우면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John William Waterhouse, Circe Invidiosa (1892)

낭만주의적 성향의 라파엘전파의 경우 유난히 팜므 파탈의 이미지가 많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Dante Gabriel Rossetti)가 그린 프로세르피네 (Proserpine)(1874)는 대지의 여신의 딸로 너무 예뻐서 지하의 신이자 죽음의 신인 하데스에게 납치되었고, 그곳에서 석류알 4알 먹는 바람에 거기서 풀려나서도 일년에 4개월은 저승에서 머물러야했다. 팜므 파탈은 아니지만, 죽음의 세계와 깊은 연관이 있던 그녀가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건 당연해보인다.  그녀의 초록빛 드레스는 그녀의 운명과 어울리는 상징적 요소로 자리 잡았다.


Dante Gabriel Rossetti, Proserpine (1874) oil on canvas ; 125.1 x 61 cm, Tate Britain


예전에 존 에버렛 밀레 (John Everett Millais)의 <오필리어 (Ophelia)>(1851)를 볼 때에는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 오필리어와 신선한 초록의 자연의 절묘한 대조가 그녀의 죽음을 더욱더 슬프고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고만 느꼈었다. 초록색의 역사를 알고보니, 초록색 울창한 수풀이 죽음의 향기를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존 에버렛 밀레는 초록이 지니는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하며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Ophelia (ca. 1851) oil on canvas ; 76.2 x 111.8 cm, Tate Britain



초록색의 독성예술가들의 고통

비슷한 시기에 쉴즈 그린의 대체물로 만들어진 패리스 그린 (Paris Green) 혹은 에메랄드 그린 (Emerald Green)도 독성을 갖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네를 위시한 많은 화가들이 노년에 실명의 위기를 맞았고, 세잔은 심한 당뇨를 앓게 되었는데, 모두 이 독성 염료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패리스 그린 혹은 에메랄드 그린. 예술적일 것 같은 예쁜 이름에 걸맞지 않게 독성을 갖고 있었다니. 무엇보다 초록색 염료가 거의 예외없이 독성을 가지고 있었다니! 초록색, 알고 보면 무서운 색이다.  


초록색의 현대적 의미

한때 판매금지가 되었던 압생트는 오늘날 유독성 물질을 제거하고 재생산되고 있고 초록색 물감은 더 이상 독성 물질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독성이 제거된 초록색은 환경문제와 맞물려 자연과 생명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의미로 재탄생했다. 초록색은 이제 안정감과 지속 가능성을 상징하는 색으로 패션과 예술계에서 사랑받고 있다. 초록색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정말 다행이다. 독성을 담고 있었다는 것은 무섭지만 그 이중적인 매력은 여전히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 같다.  





 

#인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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