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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띠스통 Jul 18. 2024

내가 좋아하는 여자들: 이경미 감독, 정서경 작가

미쓰 홍당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좋아하시는 분 찾아요호~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에 나오는 옴잡이 백혜민은 "재수 옴 붙었다"할 때 옴을 먹어서 없애는 NPC 같은 인물이다. 이번 생에 여자로 태어난 게 어떠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새로워요. 생리통 빼고는 다 좋습니다. 근데 밤에 혼자다니는 건 좀 무서워요.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엥?

생리통도 아프고, 밤에 혼자다니는 것도 무서운데 좋을 게 뭐가 있어?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여자라서 좋았던 적은 딱히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유명하다는 작품들을 찾아 열심히 봤다. 데미안, 싯다르타, 그리스인조르바, 니체, 맨 오브라만차, 프로이트 등등 대부분 남자가 만들었고 주인공인 얘기였다. 그중에는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인간이 아니니 이해하고 보듬어 주어야 한다는 표현도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 양반이 주장인지라, 주눅이 들었다. 


우디 앨런과, 박범신도 좋아했다. 도덕적인 것과는 별개로 금욕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작품들을 못쓸 것 같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긍정적인 여자 캐릭터가 대개 팜므파탈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작품을 계속 보면 매력적인 인간이 되고자 팜므파탈을 목표로 삼고 싶어진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여자가 활약하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여자도 할 수 있다" 라거나, "여자는 이런 점이 힘들다"는 메세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공감가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부담스럽고 거부감이 들었다. 

근데 요즘에는 좀 달라졌다. 세상에 멋진 작품을 내놓는 여자들이 너무 많다. 내가 요즘 좋아하는 여자는 이경미 감독과 정서경 작가이다. 


그들의 작품을 볼 때면, 자극적이고 웃기고 흥미로워 집중하게 된다. 다 작품을 보고 나면, 꽃가루 같은 것이 몸속에 내려 앉은 것처럼 간질간질하다. 어디가 간지럽나 생각해 보면, 의외의 불편함이나 왠지 모를 따뜻함을 발견한다. 그 안에는 내가 모녀관계를 겪기 때문에, 혹은 여자로서 연애를 해봤기 때문에, 어떤 결핍이나 오지랖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맥락이 숨어있다.  



영화감독, 이경미


이경미 감독은 <미쓰 홍당무>, <보건교사 안은영>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이다(보건교사 안은영 각색). 이경미 감독은 러시아 학과를 나와 회사 생활을 하다가, 영화감독으로 전향했다.  



<미쓰 홍당무>에는 러시아어 교사들이 나온다. 러시아어 여교사가 "자지깔까"라고 말하며 유부남을 유혹하는 장면이 있다. 러시아어로 라이터라는 뜻이다. 감독은 이 대사를 쓰면서, 이 대사를 쓰기 위해 대학부터 회사까지 그 세월을 거쳤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나의 꿉꿉하고 가치 없는 시간들도, 꾹꾹 쌓여 있다가 어떤 순간에 빵 하고 터트릴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미쓰홍당무>에서 진짜 좋아하는 장면은 따로 있다. 교사 양미숙(공효진)이 중학생 서종희(서우)와 학교 장기자랑을 나가기 직전 장면이다.  


양미숙: (무대에 나가기 싫어하면서) 나는 내가 너무 창피해 

서종희: 그만해요! 하나도 안 창피하니까 


이 장면에서 눈물도 터트렸다. 또르르 운 게 아니라 으엉~ 하고 울었다. 사실 진짜 창피하다. 교사가 중학교 장기자랑에 나가는 것도, 나가서 이상한 연극을 하는 것도, 그걸 몇 날 며칠 준비한 것까지도 다 창피하다. 그런데, 태어난 게 이 꼴인데 어쩌라고 하며 패배감에 절어 사는 양미숙에게 ,떽! 하고 아니라고 말해주니 왠지 안도감 들어 눈물이 났다.  


나도 내가 참 이상하고 별로인데, 정신건강을 위해 더 생각하기를 대충 멈춰놓았다. <미쓰 홍당무>를 좋아하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시나리오 작가, 정서경


정서경 작가는 <헤어질 결심>, <아가씨>, <박쥐>, <작은 아씨들(드라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시나리오 작가이다.  


나는 그 중에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가장 좋아한다. 주인공 영군(임수정)은 아주 약한 빌런이다. 스스로 인간을 죽이러 온 기계라고 생각하는데, 밥 먹으면 고장이 난다고 믿는다. 그래서 힘이 없어 인간을 못 죽인다. 박일순(정지훈)은 그런 영군에게 관심을 가진다. "싸이보그라도 밥 먹으면 안 돼?"라고 말하다가, 밥을 먹으면 충전되는 기계로 업그레이드 수리를 하는 척을 해준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이 영화가 왜 좋냐 하면, 잘 모르겠다. 그냥 좋아서 여러 번 보고 또 봐서 대사들도 외우고 있을 만큼 좋아한다. 인물 한 명 한 명이 사랑스럽고, 대사 하나하나가 웃기다. 영군의 망상이 깨지지 않는 것도 좋다. 그들이 사는 병원은 마음이 활짝 열린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아주 연약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다.  


나는 생각이 많다. 고민도 많다. 늘 부정적인 건 아니고 재밌는 얘기도 많은데, 이걸 말하면 누군가는 '또 이상한 생각에 빠져있었구나', '쓸 데 없는 걱정 좀 하지마'라고 말한다. 그 덕에 그런 이야기는 아무 데서나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언젠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넌 그런 생각을 했구나. 난 이런 생각했는데'하면서 이상한 생각들과 쓸데없는 걱정들로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을 것 같다.  


 

생리통 빼고는 다 좋습니다


까지는 아니고, 요즘 꽤 좋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인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을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고, 그 사람과 비슷해진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서 좋다.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시대에 살아서 다행이다. 이경미 감독은 어떤 경험을 했기에 여자라서 좋다는 대사를 드라마에 쓰기로 했을까 궁금하다.

  

최근에는 뉴진스를 좋아하게 되었다. 살면서 여자 아이돌을 좋아해본 적이 없었는데, 뉴진스를 보고 있으면 청량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운동도 하고 싶고, 영어도 잘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다. 참 좋다. 글도 쓰고, 운동도 하고, 영어 공부도 하면서 멋져지는 게 팜므파탈이 되는 것보다 빠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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