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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Sep 09. 2018

세월은 감정이 없다 -체실 비치에서

  포스터의 글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가장 행복했던 날, 우리는 헤어졌다니, 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이런 원초적인 호기심을 안고 출발했지만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상투적인 반전은 없다. 이를 테면 아침 드라마 같은 막장 반전은 없다. 그런데 그 점이  또 다른 충격을 준다. 그들의 이별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비의 미세한 날개짓이 태풍이라는 결과에 도달하듯이 신혼의 첫날밤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대로 뒀더니 엄청난 세월의 흐름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내가 충격을 받았다면 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흘러간 세월이 주는 허무함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많다. 한순간의 실수가 어이 없는 결과를 낳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도 많으며 그런 주제를 효과적으로 인식시키는 데 영화만한 매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체실비치>만큼 가볍게 다룬 영화는 처음인 듯 하다. 바람처럼 훅 지나갔는데 알고보니 그 바람의 무게는 엄청난 것이었다고 마치 거짓말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행위는 위험하다. 여러가지 심리적인 요인들이 미세하게 합쳐져 첫눈에 반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결코 미래 역시 동일할 것이라는 보장을 하지 않는다.

첫눈에 반해서 첫날밤까지 왔다. 그 사이에 들어 있을지 모를 불안한 요소들을 플로렌스는 눌러놓는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그 한순간을 결코 흘려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서 뭔가 불안감을 알아챈 목사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생각해보라는 조언을 한다. 그러나 플로렌스는 전광석과도 같았던 한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플로렌스는 에드워드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에드워드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플로렌스는 자신의 노력이, 그리고 끊임없이 배출되는 언어가 둘 사이를 구원하리라고 믿는 사람 같다. 첫날 밤에 이뤄질 성관계에 대해서도 미리 공부한다.


신혼 첫날 침대위에서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두 사람은 이전에 한번도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초짜다. 첫날밤 관계에 성공해야된다는 압박감은 에드워드를 움추러들게 만들고 플로렌스에게 계속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그리고 서투른 방식으로 끝나고 만다. 문제는 그 이후다. 두 사람은 성관계에도 서툴렀지만 서로의 감정을 추스리는 데도 서투르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성격 차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여기다. 체실비치에서 둘만 서 있는 장면은 마치 이 세상에 두 사람만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바람은 끊임없이 불고 플로렌스는 차갑고 선명한 파란색 투피스를 입고 있다. 플로렌스는 비장한 얼굴로 자신이 방금 경험했던 사건을 바탕으로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확인하다.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에드워드는 남성으로서 자존심을 위협하는 커다란 사건으로 해석한다. 작은 나비의 몸짓을 에드워드는 태풍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정말로 태풍같은 변화를 가져온다.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여러가지 해석을 불러왔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거의 종반부에 이르러서야 이야기의 본론이 시작된 느낌이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닫는다. 세월은 감정이 없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간다. 세월을 잡고서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도 있고 그냥 흘려보낸 사람도 있다. 에드워드는 분명 엄청난 것을 놓쳤다. 하지만 플로렌스는 오히려 자신에게 더 잘 맞는 자리를 찾고 더 많은 것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체실 비치에서 시리도록 선명한 파란색 투피스를 입고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에드워드에게 충격적인 선언을 하는 플로렌스는 어디로 간 것일까. 십수년간 에드워드의 마음 속에 있었던 플로렌스는 체실 비치의 플로렌스였다. 실제 플로렌스는 그렇게 변했고 발전하고 있었건만 그때 플로렌스를 등졌던 에드워드는 그렇게 십수년전 체실비치에서 등진 상태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나를 소름돋게 만든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닌 장난처럼 무심하게 흘러간 세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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