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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Jan 18. 2020

셋째로 태어 났지만 첫번째로 돌아가다.

어머니는 셋째 딸이었다.

엄마 생전에 엄마도 누군가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외할머니, 그러니까 엄마의 어머니를 처음 봤을 때는 이미 치매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본인의 딸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라, 손녀는 더군다나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 외할머니를 봤던 때는 정말 이상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린 아이였던 나는 치매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그 상황은  내 머리 어느 곳에도 등록될 자리를 찾지 못했다. 


나는 엄마와 이모들이 외할머니 앞에서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냐고 물을 때부터 기이했다. 이 사람은 정말 엄마와 이모를 낳은 사람이 맞을까. 딸이 엄마한테 나를 기억하겠냐고 묻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동안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내가 기대하고 있었던 외할머니에 대한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그래서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바로 삭제됐다. 나는 그 이상한 할머니가 나의 외할머니임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엄마라는 사실도 인정할 수 없었다. 외할머니는 곧 돌아가셨다.


엄마는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내가 컸을 때, 언젠가 엄마가 외할머니 이야기를 딱 한번 했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때 기분이 참 묘했다. 엄마가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외할머니가 "아이구 내 새끼 오냐"라고 했을 때 매우 행복했다는 것이다. 그 사물 같이 앉아 있던 그때 그 할머니가 그런 정겨운 말을 했을 리가. 믿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지어낸 말은 설마 아니겠지. 게다가 여장부인 엄마가 누군가의 사랑스런 새끼였을 때가 있었다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엄마도 누구에겐가 보호받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일 거란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엄마는 세 자매 중 막내였다. 큰 이모와는 열 두살 차이였고 둘째 이모와도 열살 가까이 차이가 났다. 하지만 엄마는 세 자매 중 가장 활동적이었고 가장 주도적이었다. 큰 이모에게 우리 엄마는 거의 딸 같은 존재였다. 큰 이모의 자식들이 모두 외국에 사는 탓에 곁에서 큰 이모를 챙겨줬던 사람은 엄마였다. 그런데 12살이나 아래였던 우리 엄마가 80세의 나이로 가장 먼저 돌아가셨다. 이모는 그 당시 92세였고, 갑작스런 엄마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치매가 왔다. 그리고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그 이모가 어제 돌아가셨다. 99세의 나이로 외로운 삶을 마감했다. 둘째 이모가 96세 나이로 작년에 돌아가신 지, 몇 개월만이었다. 이모들의 연세만 생각한다면 외가는 장수집안이었고, 그런 집안의 막내였던 우리 엄마는 지금쯤 살아계시는 게 맞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쓸 데 없이 잠깐 했다. 큰 이모의 죽음으로 세 자매는 흔적없이 사라졌다. 


가끔 현실이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렇다. 이모들을 자주 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내 삶에 큰 차이도 없고, 이모들은 95세를 모두 넘기셨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죽음이었다. 이모들의 자손들 역시 편해보였다. 마지막 숙제를 마친 홀가분한 얼굴이다. 남은 것은 이상한 느낌뿐이다.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 그것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이모들까지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니, 이제 엄마가 이 세상에서 머물다 갔다는 흔적마저 사라진 느낌이다. 


결국에는 모두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죽음은 늘 이상하게 느껴진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결국 다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면 더 이상하다. 나는 결코 죽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자신이 그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그때나 이해될 수 있을까. 


가장 슬픈 것은 현실이 역사가 됐음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기억할 수도 느낄 수도 있지만 그 순간을 살 수는 없다. 그렇게 살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씩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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