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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Jan 08. 2018

나의 영화는 지금 상영되고 있다


   

– 나의 영화는 지금 상영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를 살지 못한다. 과거에 머물러 있거나 미래를 걱정하는 것에 현재를 소비한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현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은 과거이거나 현재라는 탈을 쓴 쓸 데 없는 걱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라.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들려주기를 좋아한다. 과거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주인공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는 아무리 해도 싫증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자신이니까. 여러 모임에 참석하다 보면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아우성이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일이 훨씬 힘들다.

  

  그런데 이야기는 전달할 때마다 약간씩 달라진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대상에 따라 강조하는 부분이 달라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긴 하지만 청자에 대해 늘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 누가 있건 화자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상상의 청자를 두고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갈 때도 있다. 때로는 마음이 여려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이미지를 원할 때가 있다. 지나온 삶 속에서 건져 올린 삽화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가련한지 스스로 감동해 눈물이 주르륵 나온다. 때로는 모든 삶을 헤쳐 온 강한 이미지를 원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어려운 시기에 봉착했을 때마다 꿋꿋하게 이겨 낸 삽화들도 허다하게 생각난다. 이야기를 진행할수록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목소리에 힘에 실리고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어느새 나라는 사람은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용감하고 현명하게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 내가 얼마나 부모님께 사랑받고 귀하게 큰 사람인지 설명할 때는 어느새 나는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고 내가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는지 설명하다 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질투를 받아 구박 덩어리가 된 신데렐라가 되어 있다. 

  

  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나 자신이 모두 다 나다. 나는 한 가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모습은 하나이고 어떤 일이 와도 변하지 않을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나란 사람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를 때가 있고 유치할 때도 있으며 내가 생각해도 대견할 만한 행동을 할 때도 있다. 그러니 어떤 상황이 됐을 때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할 가능성도 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베드로는 자신이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난 후 자신이 생각해왔던 정체성으로 되돌아온 후에는 충격과 회의에 빠진다. 나란 도대체 어떤 인간이란 말인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에 모든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다 잘 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인 줄 알았다. 책에서 보면 늘 할머니들이 손자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가. 우리 할머니는 재미있는 이야기는커녕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으며 아이들을 싫어하는 분이셨다. 상상 속 할머니는 나의 할머니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현실과 상상이라는 분리된 세상을 들락날락했던 같다. 

  

  상상의 세계를 체감할 수 있게 기여한 것이 영화였다. 우리 가족도 내가 꿈꿨던 가족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는데 어린 시절 내가 꿈꿨던 가족의 모범은 <작은 아씨들>에 나온 가족이었다. <작은 아씨들>은 여러 차례 영화화됐지만, 나의 영화는 1949년에 제작된 머빈 트로이 감독의 영화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에이미 역을 했고 준 앨리슨이 조 역을 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에게는 분명히 자신과 동일시하는 캐릭터들이 있다. 그리고 그 캐릭터의 심정이 되어 서사를 따라간다. <작은 아씨들>에서 내가 되고 싶었던 캐릭터는 조였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분신 중에는 예전에 내가 꿈꿨던 캐릭터도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다양한 분신들은 현재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에너지가 되어준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캐릭터들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나이지만 상상과 허구의 세계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에너지를 내게 준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너무나 다양한 상황에서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다. 나와는 전혀 다른 상황과 캐릭터들이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소소하지만 강력한 자신의 일부분과 만나게 된다. 인간은 혼자서 서야 하지만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신기하게도 나에게 힘을 준다.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나라는 존재는 지금 이 순간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과의 그물망 속에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상상적인 것이든, 실제이든 간에 관계라는 그물망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혼자 힘으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나약한 나를 떠받드는 힘은 오히려 현실과 상상의 결합에서 나온다. 현실을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전적으로 현실에 매달려서도 안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현재에 머무른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합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진정으로 현재를 살고 있는가. 나의 정신과 영혼은 현재 이 순간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과거를 헤매고 있는가. 아니면 불안한 미래만을 걱정하고 있는가.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외치던 카르페 디엠을 다시 외쳐본다. 그가 외쳤던 카르페 디엠은 현재를 흥청망청 즐기라는 뜻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현존에 대해 잊지 말라는 뜻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나는 내 마음속에 숨어 있는 재스민에게, 그리고 이 세상 어디엔가 있을 재스민에게 다시 한번 카르페 디엠을 외쳐본다. 


   영화관의 영화가 끝나는 곳에서 나의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나의 영화는 지금 이 순간 상영 중이다.


                                                                                                      -<신경증자 재스민의 영화로 버티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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