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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Dec 24. 2017

미각이 이어주는 행복의 환상

   어느 날 체중계에 올라간 나는 경악했고 내 눈을 의심했다. 차라리 체중계가 고장났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내 생애 마지막 다이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 번째 다이어트다. 대부분이 그렇듯 초등학교 때는 말라깽이 소리를 들었고 대학교 때에도 나는 마른 편이어서 살이 찔 걱정은 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교 시절에는 집에 거의 붙어 있지를 않았고  밖으로 싸돌아다닌 탓에 활동량이 많아서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 살찐 사람들의 이야기는 먼 나라 이야기인 줄만 알았고 계속 그럴 줄 알았던 것은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첫 번째 다이어트는 둘째를 출산하고 난 후였다. 임신 중에도 첫애 때보다 10킬로 이상 더 찐데다 출산 후에도 잘 빠지지도 않았다. 둘째를 출산한 후 옷을 사러 갔는데 나를 흘낏 본 백화점의 여성 점원이 우리 매장에는 맞는 사이즈가 없을 것 같다면서 아예 시선도 주지 않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살찐 사람들이 받는 대우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그 당시는 30대 초반이라서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살도 잘 빠졌다. 두 번째 다이어트를 하게 된 것은 번역 일을 시작하고 나서 또 살이 불었기 때문이다. 그 때도 식단 조절만으로도 살은 잘 빠졌다. 생애 마지막 다이어트라고 다짐한 세 번째 다이어트는 가장 힘들었고 분명히 살이 빠졌는데도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도 못했다.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식단 조절로 살을 뺄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고 적지 않은 돈을 내고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번엔 예전 두 번에 걸친 다이어트 때 나타나지 않았던 현상이 나타났다. 열흘간 밥을 한 끼도 먹지 않고 대체식품만 섭취했는데 그 시간은 지옥이었다. 칼로리가 거의 없는 식품을 섭취하는데도 킬로수는 생각보다 빠르게 줄지 않아서 나는 ‘이게 다 나이 탓인가 보다’ 생각하며 힘들어했다. 기운도 없는데 이것저것 해달라고 하는 가족에게 짜증을 냈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런 가운데 음식에 대한 욕망이 엄청나게 커졌다. 보식 기간이 시작되면서 소량의 야채와 단백질 식품이 허용되자 예민해진 나의 혀는 잠자고 있던 미각을 작동시켰다. 작은 방울토마토 하나, 푸른 야채들, 푸석한 닭 가슴살 한쪽이 그렇게 달콤하고 맛있는 줄 처음 알았다. 혀끝에 감도는 야채의 달콤 쌉사름한 맛과 향, 세로로 갈라지는 닭고기의 육질이 내게 그 정도로 행복감을 줄줄은 몰랐다. 잡지책에 나온 음식 사진도 예전의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을 심리적으로나마 채우고자 식도락이 주제인 일본 드라마를 찾아봤다. <고독한 미식가>, <방랑의 미식가>와 <심야식당> 시리즈를 줄창 틀어놓고 봤는데 효과가 좋았다. 나의 뇌는 연속해서 음식의 비주얼과 음식에 대한 설명, 그리고 주인공이 먹는 모습으로 채워지느라 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였다. 먹는 모습을 보면 나도 배가 고파지는 게 당연한 건데 먹는 장면들을 쉴 새 없이 보고 있자니 반대로 배가 차는 느낌이었다.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일을 하기 위해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밥을 먹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혼자서 음식을 음미하고 즐기면서 먹는 시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머지 삶을 이어나가게 하는 원동력을 만드는 시간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음식을 한 입 물고 눈을 감은 채 음미하면서 천국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묘사한다. 

  

   이탈리아 영화 <아이엠 러브>에서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가문에 시집온 러시아 출신의 엠마(틸타 스윈튼 분)는 요리사인 아들 친구가 만든 요리를 맛보면서 자신이 격식과 예법으로 가득 찬 이탈리아 최상류층 가정에서 숨 막히는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불현듯 깨닫는다. 숨구멍이 열리듯 깨어난 감각은 그녀를 아들의 친구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그로 인해 충격을 받은 아들이 사고로 숨지는 불행한 일이 발생했지만 그녀는 힘들게 찾은 진정한 자아를 포기하지 않고 권세와 부를 뒤로 한 채 소박한 운동복 차림으로 고고한 저택을 뛰쳐나간다. 죽어 있던 자아를 찾으려는 욕망이 깨어나도록 만든 촉매제는 바로 요리였다. 엠마가 아들의 친구인 셰프가 만들어준 새우 요리를 먹으면서 혼자만의 판타지에 빠지는 장면은 엠마의 죽어 있던 감각이 꽃봉오리가 벌어지듯 피어나는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영화 <초콜릿>에서 외지에서 온 한 여인(줄리엣 비노쉬 분)은 마을에 초콜릿 가게를 차린다.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도덕적으로 엄격할 것을 강요하며 사람들을 옥죄이는 시장 때문에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며 기계적인 삶을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은 초콜릿을 맛보면서 자신이 잃어버렸던 욕망을 되찾고 마을은 사랑과 정열로 뜨거워진다. <바베트의 만찬>에서도 요리가 가진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 어느 날 프랑스에서 온 한 여인은 프랑스의 유명 식당에서 셰프로 일했던 사람인데 그녀가 만든 고급요리가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켜 시기와 불화를 녹이고 사랑과 감사, 화합의 마음으로 바꾸어놓는다.    

 

    이외에도 자의든 타의든 열악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살아갈 의지와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것은 바로 요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들은 많다. 일본 영화 <남극의 셰프>, <스키야키>도 그런 영화들이다. 그런 영화들은 언제 봐도 기분 좋고 행복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은 살만하다는 행복한 환상에 잠시나마 취하게 만든다. 때로는 그런 환상이 주는 힘이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경증자 재스민의 영화로 버티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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