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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Dec 23. 2017

케빈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케빈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그렇게 많은 영화 속에서 사이코패스들이 등장했는데 또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러 가고 싶은가? 물론이다. 이유는? 

첫째, 현실 속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둘째, 영화적 내러티브에 대한, 캐릭터에 대한 호기심과 공포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재확인이라고나 할까.

  

  2011년에 만들어진 림 램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는 많은 이들 사이에서 회자하는 영화들 중 하나다. 교육계, 심리 치료 관련 분야에서는 꼭 한 번쯤 언급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이상심리학 강의에서 많이 인용하는 영화다. 

 

   만약 케빈이 전문가가 말하는 사이코패스의 범주에 확실하게 들어맞는 캐릭터였다면 그냥 공포 스릴러, 심리스릴러 장르 속에 파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의 행동은 사이코패스의 행위가 분명하다. 이유 없는 살인을 감정 없이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영화에서 원인을 잘못된 모성 쪽으로 슬쩍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는 특정한 누군가에게 원한을 두지 않는다. 감정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케빈은 유독 엄마를 표적으로 하고 있다. 가족을 다 죽이지만 엄마만은 살려둔다. 대상이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대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사이코패스 정의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말하자면 영화적으로 변형된 사이코패스 캐릭터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어필하는 부분이 있고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느껴야 하는 이중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가장 귀한 창조물이라는 뿌듯함과 자신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한다는 압박감이다. 동물과는 달리 매우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의 아이는 양육자의 전적인 희생을 필요로 하고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 모성 신화다. 이 영화는 모성 신화에 문제를 제기하는 듯하다가 모호하게 끝을 맺는다.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린 듯한 틸타 스윈튼의 공허한 눈빛 역시 공감하는 여성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엄마를 향한 아들의 증오에 찬 눈빛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들로부터 부당하리만큼 과잉되게 발산되는 증오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영화는 임신 전부터 엄마가 가지고 있었을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출산 후 아이를 키우면서 느꼈을 법한 회한과 절망감을 연결하려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이코패시의 동기를 찾아가려는 시도는 원치 않는 듯하다. 엄마의 사랑이 아들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했다면 그 옆에는 나무랄 데 없이 자상한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와 여동생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행위는 현실 속에서 동기를 찾으려는 시도를 무색하게 만들고 그가 늘 엄마를 향한 증오와 경멸로 표현했던 그의 안에 도사리고 있었을 특별한 욕망은 어떤 것이었을까라는 질문으로 관심을 돌리게 만든다. 물론 영화는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빈에 대하여>는 영화적으로 잘 만들어진 사이코패스 영화라고 하고 싶다. 단순히 사이코패스의 특징들을 나열해 내러티브를 엮어가는 영화라기보다는 사이코패스에 반응하는 엄마의 시선으로 영화를 이끌고 가고 있으며 현재 속에서 과거를 찾아가고 다시 현재 속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면서 엄마로서 사이코패스 아들에게 갖는 혼란스러운 감정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시초부터 시작됐을 엄마와 아들은 어떤 관계였을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처럼 모호하다. 한때 자신의 일부였지만 거부 하고 싶었던 일부분, 부정하고 싶지만 자신의 모습을 닮기도 한 아들, 하지만 동시에 자신과는 너무나 다르고 이 세상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아들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영화는 범죄자 사이코패스 앞에서 누구나 묻고 싶은 질문, '왜 그런 짓을 했니.'라는 물음을 관객을 대신해서 틸다 스윈트의 입을 통해 던져준다. 그리고 케빈이 말하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는 살인들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는 여러 가지 사이코패스 유형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공포스릴러 영화에서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모티브로 사용돼왔던 사이코패스에 대해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또한 감정적으로 학대하고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한계점까지 몰고 가는 끔찍한 아이를 끝까지 부정하지 않고 수용함으로써 모성 신화의 제스츄어를 보이면서 동시에 지옥의 현실 속에서도 엄마가 아닌 독립적인 개체로서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영화를 다른 많은 사이코패스 영화들과 차별 짓게 만드는 지점이다. 아들의 목적이 엄마의 철저한 몰락과 그에 대한 확인이었다면 여전히 건재한 채, 아들을 안아주는 엄마의 태도는 사이코패스 아들의 뒤통수를 치는 일이다. 

 

   이 영화에서 엄마라는 존재가 위치하게 되는 모호한 지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엔딩 씬에서 어리둥절해 하는 아들을 껴안는 모습 역시 희망도 절망도 아닌 모호함으로 관객을 잡아둔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그리고 아이들을 교육하고 치료한다는 것은 늘 모호함 가운데 서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신경증자 재스민의 영화로 버티기> 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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